반응형

문학 254

12월의 시(詩)

벌써 12월입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던 달력이 마지막에 왔네요. 일 년 동안의 일들을 뒤돌아 보며, 훈훈한 12월이 되길 소망합니다. 목필균. 시 마지막 달력을 벽에 겁니다 얼굴에 잔주름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 마음도 많이 낡아져 가며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세상살이 일 초의 건너뜀도 용서치 않고 또박또박 품고 온 발자국의 무게 여기다 붙여놓습니다 제 얼굴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으로 가는 마지막 한 달은 숨이 찹니다 겨울바람 앞에도 붉은 입술 감추지 못하는 장미처럼 질기게도 허욕을 쫓는 어리석은 나를 묵묵히 지켜보아 주는 굵은 나무들에게 올해 마지막 반성문을 써 봅니다 추종하는 신은 누구라고 이름 짓지 않아도 어둠 타고 오는 아득한 별빛같이 날마다 ..

문학 2023.12.01

'허물'

정호승. 시 느티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꼼짝도 하지 않고 달라붙어 있다 나는 허물을 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어 있는 줄 알았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 허물은 허물을 벗고 날아간 어린 매미를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허물의 힘에 놀라 슬며시 손을 떼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보았다 팔순의 어머니가 무릎을 곧추세우고 걸레가 되어 마루를 닦는다 어머니는 나의 허물이다 어머니가 안간힘을 쓰며 아직 느티나무 둥치에 붙어 있는 까닭은 아들이라는 매미 때문이다 (감상: 매미는 탈피(脫皮)를 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날아간다. 그 탈피된 허물이 붙어있으려고 안간힘을 쏟는 것은 ..

문학 2023.11.30

'애끊는 아버지의 뒷모습'

현수막,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오늘도 소녀를 만났다. 아니, 소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여느 때처럼 소녀는 서울 남산터널 앞 신호등 위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수줍게 웃고 있었다. 나는 2023년 가을에 서 있었고, 신호등 건너편의 소녀는 1990년대 말 어느 계절 경기 평택 어딘가에서 웃고 있었다. 사늘해서 더 맑게 느껴지는 하늘 아래 걸린 현수막. 팽팽하게 걸어 또렷이 보이는 소녀의 얼굴과, 그날의 사연을 담은 굵은 고딕체 글씨가 보는 이를 더욱 아프게 한다.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아버지는 딸의 얼굴이 담긴 현수막을 걸며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다. 딸을 기다리다 먼저 세상을 등진 아내의 바람까지 등에 지고, 공부 잘하고 착하고 잘 웃고, 그래서 더없이 예쁜 어린 딸을 찾고..

문학 2023.11.29

버림받은 두 아들의 '엄마'

'열다섯' 엄마의 눈물 제 나이 열다섯. 딸이 귀한 집의 막내딸로 태어나 공주님처럼 남부끄러울 것 없이 자랐습니다. 먹고살기도 힘든 그 시절,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과외까지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시련은 소리 소문 없이 절 찾아오고 있었나 봅니다. 철없는 여중생이었던 전 그만, 과외 선생님의 아이를 갖게 되었고, 여중생이었던 저를 곱게 볼 리 없는 어려운 시댁생활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둘째까지 임신했지만, 남편은 더 이상 제 사람이 아닌, 다른 여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철없이 혁이와 훈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제 능력으로 도저히 두 아이를 키를 수 없었습니다. 면목은 없었지만 다시 친정 가족을 찾게 되었고, 새 삶을 살기 원하는 가족들은 큰 오빠..

문학 2023.11.28

함께 가는 길

빨리 가는 방법 영국의 어느 광고회사가 큰상을 내걸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퀴즈를 낸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갈 수 있느냐는 내용의 퀴즈였다. 이런 퀴즈가 신문 방송등을 통해 나가자 수많은 사람들이 즉각 응모했다. 이 퀴즈의 정답을 맞히는 사람에게 주겠다는 상품 내용이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이 퀴즈에 응모한 사람들의 대답은 실로 다양했다. 비행기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 또는 가장 빠른 기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시점에서 내려 오토바이를 타고 지름길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 헬리콥터로 가다가 비행금지구역에서 내려 선수용 자동차로 바꿔 타고 간다.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우주선을 빌려 타고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수많은 응모자들 중에..

문학 2023.11.27

'술 주정뱅이' 대통령

미국의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을 지낸 루즈벨트.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미국의 대공황을 타개한 41대 대통령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어느 날 주간지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자기가 술주정뱅이란 기사가 실린 것이다. 손해배상 재판 기분이 언짢은 그는 비서관을 불러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어떻게 처리할지를 물었다. 비서관은 당장 잡지사 사장과 담당기자를 불러 따끔하게 혼을 내자고 건의했지만, 그것은 권력의 남용이라고 생각하고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정식으로 법원에 고소를 하세. 그리고 명예훼손으로 손해 배상을 청구해야겠네' 비서관은 꼭 그렇게 까지 해야 될까 싶었지만 대통령의 그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에 재판이 열리고 많은 방청객이 몰렸다. 대통령에 대한 예민한 재판인 만..

문학 2023.11.25

'창밖의 여자'와 엘리엇의 '황무지' (하)

죽지 않고 오래 사는 '슬픔' 아폴론 신은 '쿠마에 무녀'를 몹시 예뻐했기에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무녀는 신에게 한 줌의 모래를 들고 와서, 이 모래의 숫자만큼 생일을 갖게 해달라고 말했다. 무녀는 오랜 생명만을 요구했지 젊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죽지 않았고 계속 육체의 크기만 줄어들었다. 마침내 목소리만 남았다. 영원의 긴 생명의 축복은 그녀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저주가 되었다. '황무지'의 詩 첫 부분에 언급되는, 쿠마에 무녀(Cumaean Sibyl)는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 쿠마에에서 살았으며, 뛰어난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쿠마에의 무당 여인' 스토리는, 엘리엇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강렬하게 대변한다. 그녀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뭘 하고..

문학 2023.11.24

'창밖의 여자'와 엘리엇의 '황무지' (상)

'그대의 흰 손' 최루탄이 매캐한 캠퍼스에서 울부짖음처럼 들려왔던,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를 기억한다. 누군가 피를 토하듯 반복해서 이 대목을 불렀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그토록 목이 메어 그 노래를 따라 불렀지만, 그 노래가 말하는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창가에 떠오르는 흰 손이 무엇인지, 왜 그것이 강물인지, 거리의 가로등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절규가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1980년이 시작하는, 시대의 공기를 품어내는 '죽음과 생명의 노래'가 아니었을까. 하나의 정치가 저격당하는 죽음이 있었고, 새로운 물결을 되돌리려는 대대적인 5.18의 살육이 있었다. 음악이 시작될 때 전자파..

문학 2023.11.23

'지혜로운 여자' 詩

민경대. 시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지혜로운 여자가 많은 세상에 물거품처럼 지상의 사치를 무시하고 사는 여자가 많은 세상에 어디에를 가나 지혜로운 여자가 많이 사는 세상은 조용하고 평화가 감돌고 창의적인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해남 호박 고구마보다 수확량이 많이 나오고 지혜가 주는 유익을 아는 지혜로운 여자가 많은 시장에는 더 이상 캐캐묵은 잠언 14장의 말을 쓰레기통에 쳐 넣어도 좋은 시절이 기다려진다. 지혜로운 여자는 집을 세우지만 어리석은 여자는 제 손으로 집을 무너뜨린다. 사람의 눈에는 바른길 같이 보이나 마침내는 죽음의 이르는 길이 있다. (감상: 지혜로운 여자가 많이 사는 세상은 조용하고, 평화가 감돌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많이 나온다. 지혜로운 여자는 집안을 세우지만, 어리석은 여자는 집안을 망..

문학 2023.11.21

'아직 늦지 않았어'

It's never too late. 결코 늦지 않았다. 1948년, 미국의 여성 잡지 '마드므아젤'은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나이 여든여덟의 할머니를 뽑았다. 그 주인공은 '모지스 할머니'라 불리는 화가, 안나 마리 로버츤 모지스였다. 1860년생의 모지스 할머니는 젊은 시절을 가정부 일과 농장일로 보냈다. 종종 자수를 놓던 그는 70대 중반부터 관절염을 앓게 되자, 자수 대신 어릴 적 추억을 담은 그림을 76세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도전이든 나이는 걸림돌이 될 수 없다'라는 정신을 몸소 증명하여 미국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동네 상점에서 팔리던 그의 그림이 한 수집가의 눈에 띈 것을 계기로, 모지스 할머니는 78세에 유명 화가가 된다. 10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가 그린 그림은 ..

문학 2023.11.2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