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흰 손'
최루탄이 매캐한 캠퍼스에서 울부짖음처럼 들려왔던,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를 기억한다.
누군가 피를 토하듯 반복해서 이 대목을 불렀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그토록 목이 메어 그 노래를 따라 불렀지만, 그 노래가 말하는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창가에 떠오르는 흰 손이 무엇인지, 왜 그것이 강물인지, 거리의 가로등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절규가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1980년이 시작하는,
시대의 공기를 품어내는 '죽음과 생명의 노래'가 아니었을까.
하나의 정치가 저격당하는 죽음이 있었고, 새로운 물결을 되돌리려는 대대적인 5.18의 살육이 있었다.
음악이 시작될 때 전자파처럼 머리를 긁으며 지나가는 그 기이한 도입부도,
비장하고 절망적인 슬픔을 풀어놓는 듯했다.
다시 살아서,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일의 반복과 지겨움과 고통을 왜 감당해야 하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엘리엇의 '황무지'
예전에 대학 인문학 과정의 텍스트 속에는 장시(長詩) '황무지'가 단골처럼 들어있었다.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하는 시와 겹치면서, 시간으로 꿰어지는 우연의 필연을 느끼는 이가 왜 없었으랴.
문득, 그 감수성을 돌이켜본다.
20세기 인류를 강타했던 T. S. 엘리엇(1888~1965)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1922)의 충격은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죽고 싶다'로 시작해서, "평화"로 끝난다.
<황무지> T.S. 엘리엇. 시(부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꽃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감상: 죽은 것을 왜 살려내야 하는가. 봄은 끔찍한 기분으로 다시 살아내야 하는 시간일 뿐이다.
많은 시인들이 그토록 예찬했던 봄날의 절정은, 과연 생명에게 축복이었는가.
엘리엇에게는 봄의 찬양을 진저리 칠 만큼 끔찍한 기분일 뿐이었다.)
한번 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는 것의 되풀이, 재생, 부활은 대체 무슨 뜻인가.
그냥 죽어 있으면 좋겠는데 왜 다시 살아나야 한단 말인가.
자유로운 죽음의 평화를 왜 조물주는 빼앗는가.
<창밖의 여자> 조용필. 노래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돌아서 눈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되어 거리에 서면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감상:
한 여자가 창가에 선다.
바라보는 창가에 눈물처럼 떠오르는
떠난 그대의 깨끗한 흰 손을 발견한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그녀의 여린 손을 잡아주던 그 흰 손.
이별할 때 흔들리며 부들부들 떨던 그 흰 손이 환상처럼 떠오른다.
그러나 그 손은 잡을 수 없는 손.
절망에 눈을 감는다.
드디어 그 하얀 손은 강물이 되어 그녀를 범람한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거리로 나선다.
떠나버린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나를 위안한다. 걱정하는 불빛으로 서성이는 그대가 슬프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마치며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는, 사랑하는 당신이 나를 버리려면 차라리 그대의 깨끗한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민주주의가 없다면 차라리 핍박받는 고통보다 잠들게 하라.)
엘리엇의 '황무지'는 평화가 없는 세상 또 태어나게 하지 말라. 또 태어나게 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래서 만물을 모두 태어나게 하는 '봄'은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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