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문학의 "허구와 진실"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 김승희

e길 2023. 6. 1.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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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 허구는 진실이 담겨있는 거짓이다.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고, 문학은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허구는 원하는 대로 수정할 수 있고, 살아보지 않은 수많은 다른 삶을 경험하게 하지만 현실은 수정할 수 없다. 문학은 사람 사는 이야기이고 문학작품의 힘은 허구에서 나온다. 

문학 작품이 허구라고 하는 것은 실제가 아닌 꾸민 것, 즉 거짓, 가짜, 공상, 상상이다. 하지만 허구는 실제가 아니지만 진실을 담고 있다. 작가가 겪은 현실을 변형, 재구성, 재배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사건, 시공간 등은 꾸민 것(실제를 변형)이지만, 감정, 정서, 정신, 욕망, 삶과 세상에 대한 태도와 문제의식과 인식 등은 실제와 같다.

2001년 9월11일 'World Trade Center' 테러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 9.11에 죽은 여자를 추모하며(김승희)

110층 화염의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여자는 핸드폰을 목숨처럼 껴안고/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두 신발에 오렌지색 불이 붙은 것을 느끼면서/ 너를 사랑했다,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꼭두서니빛 불타오르는 화염으로 치마를 물들이면서/ 너를 사랑했으며 너를 사랑한다,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엉덩이를 다 먹고/ 허리 한복판을 너울너울 화염이 베어 먹는 것을 느끼면서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이 불타는 허리 이 불타는 등줄기 이 불타는 모가지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누구나 자기 무덤을 만들 시간은 없지만/ 너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여자는/ 난폭한 머리카락 난폭한 두 귀가 갈기처럼 일어서는 것을 느끼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죽지 마, 죽어선 안 돼,라고 연인이 말할 때/ 불길이 그녀의 하얀 두 손을 먹고 핸드폰을 녹여버릴 때/ 그때/ 바로 그때까지/ 죽어선 안돼, 절대로 안돼,라는 연인의 말이 전해진/ 귀 두 짝을 소중히 움켜쥔 채

110층에서 떨어진 여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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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죽음은 수정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죽음을 품위 있게 수정해서 허망하게 죽은 영혼을 달래 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작품에 배어 있다. 허망한 망연자실한 죽음을 아름답게 변형한 시이다. 마지막 '사랑해'는 관념어, 추상어이지만, 생생한 느낌을 갖도록 극적인 사랑고백의 표현을 썼다. 또한 밑으로 떨어지니까 세로로 말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주었다. 이 작품은 재구성된 허구 속에서 진실을 말하는 시이다.) 

이상의 '날개', 이카로스의 '추락'의 날개, '허구'의 날개

이상의 '날개''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는 억압되고 폐쇄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자아 극복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이카로스'의 추락은, 날 수 있는 것들은 날개를 믿고 비상하지만 그 날개로 인하여 추락하는 것이다.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마치 한참 날으는 것처럼 핸드폰으로 사랑하는 님에게 사랑한다 전화를 하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불가항력의 죽음을, 품위 있고 애절한 모습으로 사랑해를 외치고 있다. 이 변형된 허구는, 9.11 테러라는 사실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져서 더 실감할 수 있다. 허구라고 해서 제멋대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과 진심이 담겨있는 거짓'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며: 진실을 담은 허구는 삶에 즐거움을 준다.

현실은 수정할 수 없으며,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수정 불가능한 '현실'은 후회, 괴로움, 절망, 스트레스가 될 수 있지만 '허구'는 원하는 대로 수정할 수 있다. 짧은 인생에서 이 세상을 다 겪어볼 수는 없다. 그러나 허구는 살아보지 않은 수많은 다른 삶을 경험하게 해 준다.

허구는 즐거움을 준다. 문학은 사람 사는 일에 대한 이야기이며, 타인이 겪은 삶을 통해 현실의 모순과 억압을 체험하며 더 나은 삶을 살게 해 준다. 이야기 자체는 상상력이지만 현실을 재구성해서 인물 속의 욕망, 모순, 부조리 등은 사실이다. 그래서 허구는 가짜임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진실을 담은 재미있는 허구적 이야기로 재미있고 웃으면서 사는  현대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문헌: 현대시작, 시작법,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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