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김애란 소설 "달려라, 아비"

e길 2023. 5. 3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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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기 전 자신과 어머니를 두고 집을 나간 아버지의 존재를 상상하며, 늘 달리기를 하고 있는 아버지를 그린다. 우울한 아버지 보다 당당한 아버지를 상상하며 무책임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현실에 대한 명랑한 긍정으로 전환한다. 아버지를 아비로 부르는 것은 아버지를 미성숙으로 보는 화법이다. 

'달려라, 아비'

본문 (중요구절 감상)

내겐 아버지를 상상할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뜀박질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분홍색 야광 반바지에 여위고 털 많은 다리를 가지고 있다.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무릎을 높이 들고뛰는 아버지의 모습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규칙을 엄수하는 관리의 얼굴처럼 어딘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내 상상 속의 아버지는 십수 년째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데, 그 표정과 자세는 늘 변함이 없다. 아버지는 벌게진 얼굴 위로 황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아버지 얼굴 위에 일부러 붙여놓은 못 그린 그림 같다. (10면)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16면)

'재혼한 아버지의 자식이 아버지 죽음을 알림. 시체를 보고 난 후의 글': 아버지가 비록 세상에서 가장 시시하고 초라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ㅡ 그런 사람도 다른 사람들이 아픈 것은 같이 아프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상상했던 십수 년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늘 눈이 아프고 부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 아버지의 얼굴에 선글라스를 씌워드리기로 결심했다. (중략) 그리하여 이제 나의 커다란 두 손이, 아버지의 얼굴에 선글라스를 씌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썩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젠, 아마 더 질 뛰실 수 있을 것이다. (28~29면) 

문학 이론가 마르트 로베르의 '가족 로망스'

로베르는 가족 로망스의 두 단계를 '업둥이'와 '사생아'로 설명한다. '업둥이'는 자기의 부모가 보잘것없는 평민이라는 것을 알고 진짜 부모는 왕족이라고 상상하며 이야기를 꾸미는 것을 뜻하며, '사생아'는 어머니는 진짜 어머니이지만 아버지는 현재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아버지를 부인하는 단계를 뜻한다. 로베르는 사생아의 방법이 사실주의적 방법으로 세계를 도와주는 것이라면, 나르시시적인 업둥이는 자식도 없고 행동능력도 없어서 세계와의 싸움을 교묘히 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양의 모든 소설을 이 분류로 나누면 '사생아'의 방식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포크너, 디킨스 등이며, '업둥이'의 방식은 세르반테스, 노발리스, 카프카, 멜빌 등 낭만주의 및 상징주의 작가들에게서 나타난다. 발자크처럼 사생아와 업둥이의 방식이 작품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아버지의 선글라스

아버지가 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딸은 오래전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를 불러내어 뛰게 한다. '나'가 임신하고 어머니의 배가 점점 부풀어 오르자 아버지는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달려라 아비'는 일절 소식이 없던 아버지의 부고가 당도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미국에 가서 결혼해  애까지 낳은 아버지는 이혼당하고 전부인이 결혼한 집의 잔디 깎는 일을 위자료 대신 몸으로 일하고 있었다. 주인공인 '나'는 왜 아버지를 자신의 상상 속에서 계속 뛰게 했는지 그 이유를 깨닫는다. 그리고 눈부신 땡볕아래 뛰고 있는 상상 속 아버지가 얼마나 눈이 아프고 부셨을까 생각하며 선글라스를 씌워 주겠다고 결심한다.

이런 작가의 설정은 '근사한 아버지, 무서운 아버지 말고 웃기는 아버지와 친구 같은 아버지를 그리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김애란의 우스꽝스러운 아버지 이야기는 인천 달동네의 작가 부모의 이야기도 차용되었다. '소설 속의 설정은 서울이지만, 실은 저희 부모님이 처음 살림을 시작한 인천의 한 달동네가 무대예요'라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의 부모는 3,4년 이 근처에서 이방 저 방으로 옮겨 다니며 딸 셋을 낳았다. 부모님은 몇 번 이사 후에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서산행을 택했고 막내딸인 작가도 서산에서 성장했다.  

마치며: 소설안의 정직

'나는 문학이 나의 신앙이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소설을 쓰는데 배움이나 경험이 반드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 안의 어떤 정직, 그런 것이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달려라 아비 작가의 말 중에서)

김애란 소설은 도시 주변부의 소외된 삶을 청년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포착하는 데서 출발하며, 비관적인 현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주목하면서 현실을 감싸 안는, 발랄한 유머와 비애의 시선을 고유한 화법으로 드러낸다. '달려라, 아비'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서사에서 무책임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의 모습을 발랄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김애란 작가가 그리는 하층민의 비루한 삶을 풍자와 해학으로 잘 담아낸 작품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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