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법정 스님의 수필 "무소유"

e길 2023. 5. 26.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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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역설적인 소유방법으로 '인간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인간을 소유한다'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불일암 가는 '무소유길' 법정스님이 17년간 수행한 곳

법정 스님의 유언

'장례식을 하지 마라. 수의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관도 짜지 마라.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 위에 내 몸을 놓고 다비 해라. 사리도 찾지 마라. 남은 재는 오두막 뜰의 꽃밭에 뿌려라' 법정 스님의 마지막 유언이다. 실제 스님의 장례식에 관을 짜지 않았고, 대신 들것 위에 스님의 육신을 올리고 천을 덮어 다비 했다.

수필 본문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이름 있는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으로 옮겨 왔을 때 아는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 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이라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나는 떨면서도 실내 온도를 높이지 않았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개인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 노사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착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을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초를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고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틀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까.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훌훌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교훈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이니까.

무소유 해설

무소유라는 주제가 형이상학적이고 일반인이 실천하기는 어려운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쉽게 그의 깨달음에 동조하는 것은, 스님의 취향과 행동을 가감 없이 드러낸 진솔한 표현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의 역사란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여겨진다'는 아무 생각 없이 목표물을 향해 달리는 사람들의 발목을 움켜 잡고, 소유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세속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이지만 작은 집착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깊이 있는 글이다. '난'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괴로움과 번뇌는 어떤 것에 집착하고, 더 많이 가지려는 소유욕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말해주고 있다. 인간의 소유욕은 무한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가지려고 하고, 이러한 욕심 때문에 괴로움과 번뇌가 생겨나고 소유함으로써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소유욕을 버림으로써 그것보다 더 큰 마음의 평정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담담하게 서술한 명 수필이다.

마치며: 무소유=공즉시색, 유소무=색즉시공

무, 소, 유 세 글자를 순서대로 풀이하면 '없음이 있음 속에 있다'이고, 거꾸로 읽으면 유, 소, 무는 '있음이 없음 속에 있다'이다. 2600년 전 인도의 '석가모니 붓다'도 '무소유'를 설파했다. '없음이 있음 속에 있다를 공즉시색'이라고 표현했으며, '있음이 없음속에 있다는 색즉시공'이라 하였다. 정리하면 '무소유=공즉시색, 유소무=색즉시공'이 되는 것이다.

법정스님은 저절로 지나치게 집착을 하게 되는 과정을 겪으며 얻은 결론으로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곧 그것에 의해 자신이 얽매임을 당하는 것이라며, 본인이 깨달은 '무소유' 사상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본인 자신이 가고 있는 구도의 길이 주는 경건함과 구체성을 바탕으로 한 힘이 있고 깨달음을 주는 명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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