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날 이미지' 시인 오규원

e길 2023. 6. 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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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미지' 문학의 오규원 시인은 '1970년대 산업화 시대'의 대표적 시인이다. 관념으로부터의 해방과, 시적 언어와 대상에 대한 탐구와 날것 그대로의 '날이미지' 시세계를 추구하였다. '날'이란 아무런 양념도 치지 않은 살아 있는 것이란 의미로 와닿는다. 날것 그대로의 삶, 날것 그대로의 개념은 그저 무정형의 덩어리일 뿐이어서 결코 인식될 수 없다. 그것은 기호에 의해 '대체' 됨으로써 여러 사람들의 의사소통이 될 수 있다.

"나는 자연과 인간 어느 쪽에도 서 있지 않습니다. 나는 자연을 보듯 인간을 보며, 인간을 보듯 자연을 봅니다. 내가 있는 곳이 그 어디든 그곳이 바로 중심의 세계인 것입니다. 도시에서 책 속의 명제를 찾는 거나, 자연 속에서 사물의 진리를 찾는 거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도시든 자연이든 인간을 그리는 거울임은 똑같다는 것이지요"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관념, 죽은 언어와의 싸움

나의 데카메론

2월 6일, 일요일. 10시 5분 전 기상.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봄. 거리는 오늘도 안녕함. 안녕한 거리에 하품 나옴.

변소 2번(처음에는 대변, 다음에는 소변) 왕복함. 소변 후 내려다본 남근 새삼스러워 한 번 들었다 놓음. TV스위치 1번 누름. 재미없음. '오늘의 스타'란 책 1분 만에 다 봄. FM라디오 스위치 누를까 하다 그만둠. 심심해서 시계를 보았더니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져 누운 채 <이 병신, 일요일이야!> 함.

생계엔 별일 없음. 문협선거엔 미당이 당선된 모양이고, 내 사랑 서울은 오늘도 안녕함. 서울 S계기의 미스 천은 17살(꿈이 많지요), 데프콘에이 중독. 평화시장 미싱공 4년생 미스홍은 22살(가슴이 부풀었지요), 폐결핵. 모두 안녕함.(하략). (오규원,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감상: 데카메론은 이탈리아 중세 보카치오의 야담 고전으로, '나의 데카메론'은 '나의 하찮은 이야기' 쯤으로 해석되어진다. 종결어미를 명사형으로 끝낸 일기체 형식의 시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시'같지 않게 관습적인 이야기로 표현했다. 시란 대단한 게 아니고 우리 일상생활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다. 1970년대 산업화 시대의 사회 모순을 그린 작품으로 마지막 '모두 안녕함'은 반어법으로 모두 안녕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산업화 시대 영향은 데프콘에이 중독(접착제 '발암물질')과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폐결핵'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 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 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다. 자 봐라, 꽃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 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오규원,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감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말, 사실을 감추는 말, 합리화를 위해 혹사당하는 말의 유통 속에서는 말을 믿지 못하게 된다. 언어의 물성은 활물성(살아있는 사물을 붙이는 것)이다. 진달래, 노루, 사슴 등등이 자연계의 생물이라면, 그것들을 가리키는 언어들은 인간이 창조한 생물이다. 이런 물성, 활물성을 무시하고 단순한 의사소통의 기호로만 읽을 경우, 언어는 칼이나 도끼와 다름없는 도구이다. '봄'의 시에서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는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활물성의 언어'를 부여한 것이다. 이름에 얽매이지 않는 것처럼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활물성의 언어로 표현하라는 뜻이다)

언어에 대한 반성

몸으로 느끼는 삶과 세계는 생생한데, 왜 언어로 표현하면 그 생동감이 죽는가? 왜 언어는 삶과 몸, 사물을 화석화시키는가? 언어는 왜 삶을 표백시키는가? 왜 언어는 시를 배반하는가? 현실의 관념 작용은 바로 날것 그대로의 삶을 한 가지 의미로만 통합하고 규격화한다.

이 시대의 순수시(부분)

내가 이렇게 자유를 사랑하므로, 세상의 모든 자유도 나의 품속애서 나를 사랑합니다. 사랑으로 얻은 나의 자유. 나는 사랑을 많이 했으므로 참 많은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주 주택복권을 사는 자유, 주택복권에 미래를  거는 자유, 사기를 치고는 술 먹는 자유, 술 먹고 웃어 버리는 자유, xxxx 빨리 잊어버리는 자유.

나의 사랑스러운 자유는 종류도 많습니다. 걸어 다니는 자유, 앉아다니는 자유(택시 타고 말입니다), 월급 도둑질하는 자유, 월급 도둑질 상사들 모르게 하는 자유, 들키면 뒤에서 욕질하는 자유, 술로 적당히 하는 자유, 지각 안 하고 출세 좀 해볼까 하고 월급봉투 털어 기세 좋게 택시 타고 출근하는 자유, 찰칵찰칵 택시요금이 오를 때마다 택시 탄 것을 후회하는 자유,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남은 몇 개의 동전으로 늠름하게 라면을 먹을 수밖에 없는 자유.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오규원)

(감상: '웃어 버리고, 잊어버리는 자유'는 반어적으로 '비자유'를 말한다. 진실된 자유보다 허욕의 자유, 부정의 자유, 불손의 자유는 언어에 낀 관념이 불손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오염되어 있다면 순수시는 쓸 수가 없다. 언어 사용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한다.)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많은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쏠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말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감상: 화자와 대상을 동일시한 의지적이고 명령적이고 단정적인 어조를 사용한 시이다. '들판'은 곧 세상의 현실이다. 슬픔, 고독, 고통 등의 것을 시인은 회피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빈들에서 느끼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관습적인 시각과 논리의 틀을 과감히 해체하려고 한다. 자아와 대상과의 합일이나 교감의 정신을 멀리하는 그래서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그 어떤 억압이나 인습으로부터 묶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며

오규원 시인은 후기시에서 '은유에서 환유'로 시 쓰기를 시도한다. 은유적 사고의 기본틀은 A=B이다 이지만, B는 한없이 바뀔 수 있다는 특성이 있다. 나무 A= 대지의 푸른 불(B)이며, 별(C)이며, 날개(D)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시적 인식은 오랫동안 시인들이 해온 '시적 대상의 의미화' 작업이다. 은유가 관념의 산물이라면, 환유는 현상 자체를 설명하는 서술적인 것이라 생각했으며 단순한 모사가 아닌 '사실들의 허위성을 포착'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설명한다. 어떤 대상이나 관념을 직접 가리키는 대신 그 속성이나 특징이 있는 것으로 대치하는 비유법을 말함이다. 

민중 문학이나 해체 시에서 드러났던 반미학의 흐름이 오규원 시인의 시에서는, 현실 부정성으로 드러난다. 즉 관념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현실 공간을 직시하면서 현실과의 대결의식을 전면적으로 표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 소재보다 언어 자체의 본질과 기법에 더 관심을 가지며, 관념의 세계를 언어적 감각을 통해 구체화하려는 1970년대 모더니즘 계열의 오규원 시인이었다. 일상의 무의식적 삶을 파헤쳐서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계보로 오규원, 김광규, 이하석, 장석주 등의 시가 대체로 이에 속한다.

참고문헌: 오규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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