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시인 서정주 (1)

e길 2023. 6. 9.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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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시인은 '시집 15권(약 1,000편)의 양과 질 등에서 그릇의 크기가 남다른 '생명파'의 대표 시인이다. 설화, 역사, 민간전승 등의 수용, 전통의 현대적 변용과 시공간의 폭과 깊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어로 '시 세계'의 지속적인 탐구와 변화를 시도하였다.

서정주 시인의 작품에는 '화사집'에서 '동천'에 이르기까지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있다. 서정주의 생애를 지배하여 온 것이 숙명적인 '바람'이라면, 그러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기본적인 유인이 되는 것이 '피'이다. 시인의 시 세계는 자신의 '피'를 어떻게 다스려 나가는가의 고된 싸움의 과정이다. '피'에 이끌리며, 시달리며, 그것을 달래며 또렷한 맑음으로 나가는 가운데 엮어진 시의 생애인 것이다.

서정주 ';화사집'

'피'의 생명력과 저주의 운명

자화상

애비는 종이 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있을 뿐이었다./ 어메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애비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별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감상: 시인의 초기 작품으로 스스로 시인 자신의 삶의 과정을 돌아보며 생명에 대한 강렬함을 노래한 시다. 시인의 외할아버지는 동학농민 운동에 참여한 의로운 인물이며 그 외할아버지를 닮았으며, 그 피를 닮아 앞으로도 힘든 삶이 이어질 수 있다고 시인은 예상한다. '팔 할이 바람이다'는 학교를 중퇴하고 유랑, 떠돌이 생활하며 여기저기에서 '바람맞은' 고난과 시련을 말하고 있다. 힘들게 살아가는 자신을 주변에서는 '죄인', '천치'로 보고 있어 부끄럽지만 '뉘우치지 않을란다'는 많이 뉘우치고 반성한다는 반어의 뜻을 품고 있다. '병든 수캐'처럼 힘들게 살아왔지만 '헐떡거리며' 지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겠다)

화사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롱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 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우리 순내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감상: 시인은 '아름다운 뱀'을 노래하다가 '징그럽다'라고 대조되는 진슬을 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의 신화에서 '슬픔'으로 태어난 뱀은 원죄를 가졌기 때문에 아름답지만 징그러운 존재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뱀'은 발이 없어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저주받은 몸의 형태를 지녔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이라며 본능적인 욕구로 '원죄'를 범하게 한 뱀에 대해, '물어뜯고 원통히 물어뜯어' 그러면서도 '달아나거라'라고 하며 돌팔매질을 한다. 뱀의 매혹적인 '관능'을 순녀에게 스미길 바라면서, 뱀의 원시적인 '생명력을 붉은 시각적 이미지화' 했다. 또한 화사는 땅의 세계 즉 현실 세계를 말하고 있으며 피, 입술 등의 붉은 이미지와 어둠과 설움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피'는 인간의 숙명이요 맹목적인 세력이다. '피'는 숙명이므로 인간 존재의 근원(생명력)이지만, 또 그것은 맹목적인 세력이라 도리어 인간 존재 그 자체를 말살할 수 있는 가공할 파괴력(저주)을 갖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 피의 이율배반이 있다. '피'는 혐오의 대상인 동시에 지상적 생명의 동력이라는 이중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마치며: 오랫동안 '잘못 살았구나'

서정주시인은 좋은 시를 많이 쓴 거장이다. 시를 읽다 보면 '우리나라 말'을 이렇게 아름답게 쓸 수 있는가란 감탄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시인은 친일 시와 군사 독재 찬양 시 등으로 많은 지탄을 받고 있다. 변명의 여지가 없이 잘못된 것은 사실이지만, 훌륭한 문학 작품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격렬하고 자유 분방한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마약과 문란한 사생활, 흠 많은 인격과 숱한 과오, 무분별한 사치로 금치산자였지만 시집 '악의 꽃'은 문학사에 길이 남았다. 서정주 시인의 과오를 덮자는 것이 아니고, 서정주 시인의 삶을 평가하는 동시에 작품 역시 정당하게 평가를 하자는 뜻이다.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한탄하며 슬퍼하자. 그의 잘못된 삶을 책망하며, 하지만 '꽃뱀'처럼 징그럽게 매혹적인 그의 시도 평가를 하자. '수대 동시'라는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흰 무명옷 갈아입고 난 마음, 오랫동안 나는 잘못 살았구나'

(참고문헌: 천이두, '지옥과 열반'. 김화영,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 '미당 서정주'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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