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권여선 소설 "봄 밤", 김수영 시 "봄 밤"

e길 2023. 5. 6.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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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영경과 수환의 사랑은 욕망이 아니라 죽음충동의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국 '0'을 향해 달려가는 성격의 것이었다. 이 충동에만 온전히 몸을 맡겼다면 그들의 사랑은 '밤'으로만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상대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주고자 하는 이타적 삶의 의지, 즉 '봄'이 존재했던 것이고, 이것이 김수영의 시를 미친 듯 읊조리는 영경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경재, '몰락의 윤리')

결핍을 존중하는 마음

권여선 작가의 다섯 번째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창비, 2006)에 수록된 '봄밤' 단편 소설이다. '봄밤'은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고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을 하나씩 제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처음에는 따로 떨어져 있는 듯 느껴지는 조각들이 점차 하나로 묶여 나간다. 지방 요양병원에 함께 있는 영경과 수환은, 알코올 중독증과 류머티즘 관절염을 극심하게 앓고 있다. 요양원 사람들은 각자 병명의 앞 글자를 따서 '알류커플'이라고 부른다.

'봄 밤'

국어교사로 20년을 재직한 영경은 서른셋에 결혼하여 1년 반 만에 이혼을 하게 된다. 백일 된 아들은 시부모가 빼돌려 이민을 데리고 갔다. 이후 영경은 모든 일에 손을 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수환은 아내에게 배신당해 모든 재산을 잃었다. 친구의 재혼식에서 둘은 처음 만났고, 술에 취한 영경을 수환이 업고 집에 바래다준다. 둘은 사랑하게 되지만 죽음으로 내달리고 있다. 뼈가 무너져 내리는 중병 수환과, 술에 잠식되어 가는 영경은 누가 먼저 쓰러질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둘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요양병원에서 함께 의지한다. 고통의 시간을 둘의 만남으로 서로 위안하며 생애 최고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사랑도 죽음도 서둘지 말라

요양원을 나와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과 소주 한 병으로 여유 있게 시작한 영경은, 컵라면과 소주를 사가지고 모텔로 간다. 술을 마신 몽롱한 상태에서 김수영의 시 '봄밤'을 목소리를 낮춰가며 차분하게 읊조린다.

"영경은 컵라면과 소주 한 병을 더 샀다. 컵라면에 물을 부으며 그녀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서둘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영경은 작게 읊조렸다.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영경은 자신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알지 못했다"('봄밤' 33면)

영경이 수환의 배려로 알코올 금단증상을 잠재우고 있을 때, 수환은 마지막을 달려 나갔다. 영경이 앰뷸런스에 실려 요양원에 돌아왔을 때는 수환의 장례는 끝났고, 영경은 수환의 존재조차 기억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에게서 엄청난 무엇이 증발되었다는 것을 느끼는지 계속 뭔가를 찾고 있다. 요양원 사람들은 그녀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알았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만났지만, 자신들의 사랑을 완성해 간 처절한 노력과 사랑이었음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을까. 한 번의 나락이 비참하고 위험하며 처절하지만, 숭고한 사랑은 운명도 피해 갈 수 없는지 모른다. '사랑도 죽음도 서둘지 말자'는 그녀 스스로 타이르는 낭송이 들리는 듯하다.

김수영 시 '봄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 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애태우며 서둘지 말라'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야가 가려진 명료하지 않은 길을 서둘러 재촉하여 가다 보면, 수렁에 빠지거나 목표에 빗나갈 수 있다. 급하다고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기적 소리'가 아무리 재촉해도 서두르지 마라. 달, 강물 위 불빛은 희미한 빛이다. 서두르지 말고 침착해라. 아둔하게 서두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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