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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과 눈보라의 여로에서 우연히 만났다 뜨겁게 헤어졌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은 비록 여럿이었으나 결국 단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 감정은 그들과 만나, 다만 조용히 눈물을 나누고 싶다는 것이다’(작가의 말)
인물들의 태생적인 결핍과 상실감
윤대녕의 일곱 번째 소설집으로 2010년 9월부터 2013년 4월까지 발표된 일곱 편의 단편소설들은, 윤대녕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고통에 대한 사유와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잦았던 것 같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일의 고통스러움을 보여주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작가는 지금까지 특유의 여로 형식과 시적인 문장으로 인간의 의미를 세세하게 밝히려고 했다. 윤대녕의 인물들은 그들이 품은 어떤 에너지 때문에 삶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인물들이 느끼는 태생적인 결핍과 상실감이 그들을 일상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이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들을 찾아 방황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립니다
이 소설집의 첫머리에 실린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립니다'는, 어느 봄날의 아름다운 편지 ’ 상춘곡‘을 기억하는 우리에겐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다. 편지글 형식의 단편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립니다’에서 40대 여성 화자는 스물한 살 때 대학 동아리에서 만나 우연히 하룻밤을 보낸 선배에게 20여 년 만에 편지를 보낸다. “나는 당신과 오래전에 잠깐 알았던 사람이고 아마도 지금은 까마득히 잊힌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을 알면서도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그 일이 마음에 커다란 지문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고통은 언어화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그 화염 같은 속내를 고작 말로써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통해서 누군가를 이해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적든, 크든 누구나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관심하게 됩니다” (P27)
살아갈수록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들 때가 있다. 소중한 일이 생길수록 그런 걱정이 더 잦아지는데, 그래서인지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일상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쓸데없는 걱정을 스스로 만들고 해소하는 과정일 수도 있으나, 닥치지도 않은 두려움을 먼저 걱정한다는 생각에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위 ‘27P 문장’을 봤을 때 뭔가 가슴이 먹먹해진다. 누구나 가슴에 말 못 할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겠지만, 과연 그것을 쉽게 언어화시켜 타인에게 말할 수 있을까? 아픔을 토로하기만 해도 치유가 된다는 말에는 공감하지만, 그런 말을 할 기회와 용기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하지만 내가 경험하고 난 뒤에는 상황이 좀 달라진다. 큰 고통을 겪고 나면 타인이 나와 비슷한 일을 당했을 때 이해하려 하고 위로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 그대는 먼 곳에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나와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 내 손길이 느껴지나요? 그대는 잠결에 내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꿈에서 나를 보고 있지요? 밖에는 지금 먼 데서 불어온 바람이 우리를 모로 지나쳐 또한 먼 곳으로 불어 가고 있습니다. 바람의 소리가 귓전에 들리지요? 이렇듯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P34)
직접적인 현실인식
그런데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방황할 수 있는, 또 여로에 오를 수 있는 특유의 에너지를 잃고, 황폐하고 척박한 고통 속에 깊이 빠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세계가 병들었음을, 그 세계에 발을 디딘 인물들마저 함께 감염되었음을 보여주는 두 작품 '구제역들'과 '검역'에서 그러한 특징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타고난 감각으로 시대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해 내던 윤대녕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특별한 작품들이다. 어린 시절 성폭행당한 기억을 안고 사는 애인을 제 손으로 밀어냈으면서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살아온 ‘통영-홍콩 간’의 주인공은 십 년의 시간이 지난 뒤 이렇게 말한다. “그럼 사람이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뭘까요? 이해가 아닌 진실이겠지. 그리고 인간다운 그 무엇. 사람은 누구나 인간다워지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있거든.”
도자기 박물관
표제작 ‘도자기 박물관’은 주인공 남자의 상실감에 빠진 이야기로, 남자는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들어간 어묵 공장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한 곳에 정착하려나 싶은데 이번에는 도자기에 마음을 뺏겨, 공장을 그만두고 방물장수가 된다. 어느 날 보게 된 도자기에 대책 없이 빠져들면서 삶이 바뀌게 된 것이다.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던 아내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불을 견디는 심정으로 살되, 내 삶은 백자처럼 아무 무늬가 없어도 좋다’는 남편의 말에, 조수석 아내는 콧방귀를 뀌며 힐난한다. ‘염병할!’ 남자에게 삶은 빛바랜 도자기와 같다. 뜨거운 불가마의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도자기의 생인 것이다. (2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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