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아름다운 '번짐'

e길 2023. 11. 15. 00:01
반응형

문인들의 아름다운 '번짐'

엄동설한이 지나고 따뜻한 봄기운이 번질 때, 서울역 앞 지하도에 쭈그리고 앉은 걸인 앞에, 어느 시인이

'세상에는 봄이 왔지만, 저는 아직 한겨울입니다'라는 팻말을 놓아준 뒤 깡통이 지폐로 수북이 담겼다.

 

어느 허름한 가게 조그만 전광판에,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라는 자막이 흐르자 손님이 밀려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때로는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고,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각박한 사회에서,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문인'들이고,

그런 사명을 가져야 하는 것이 '문인'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문인들은 부드러운 눈길, 따뜻한 말씨가 오가는 세상의 아름다운 '번짐'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쓰고 또 쓰고 있는지 모른다.

 

웃음의 번짐(Freepik)

<번짐> 장석남. 시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 번 -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감상: 봄에 활짝 핀 목련꽃이 번져 사라지면 이내 여름이 된다. 그 꽃이 사라져 그 자리가 열매로 번지면 가을이 된다. 한 사람의 웃는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로 아름답게 '번져' 행복을 준다.

 

"너는 내게로 번져 / 어느덧 내가 되고 /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 즉 사랑은 아름다운 '번짐'이다.

번짐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나아간다. 밀어내고 부드럽게 떠나고 밀려오는, 그 '어쩌지 못하는 사랑'.)

 

<웃음이 번져 봄이 되는> 이혜숙. 시

 

웃어 보고 싶어

큰 소리로

손뼉을 치면서

웃으면 잠자는 세포들이 깨어나고

온몸을 흔들어 가며 웃으면

묵은 때가 벗겨지고

씩씩한 피돌기로 굳은 혈관이 풀어질 거야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소리가

언 땅을 녹이고

강물은 흘러

마른 뿌리를 적시며 흘러갈 거야

가시덤불을 헤치며

안개 낀 들도 지나서

오래된 숲의 잠을 깨울 거야

후드득

잠들었던 새들이 날아오르고

여린 풀들 소스라치듯 올라와

온 들은 푸르게 물이 들 거야

닭의 장풀이 지천으로 부풀고

물봉선

애기 똥풀의 노란 웃음이 폭죽처럼 터지는

웃어보고 싶어

봄물이 흠뻑 들게

웃어보고 싶어

봄이 되어보고 싶어.

 

(감상: 웃음이 번져 봄이 된다. '웃으면 잠자는 세포가 깨어나고, 묵은 때가 벗겨지고, 언 땅이 녹아 들과 세상이 푸르게 된다' 웃으면 젊어지고 온 세상이 푸르러 봄이 된다는 멋진 표현을 하고 있다)

 

마치며: 아름다운 번짐

'번짐'은 번져가고자 하는 쪽 못지않게, 받아들이는 쪽에서의 자세도 중요하다.

 

살아 있는 나뭇가지는 잘 휘어지지만, 죽은 나뭇가지는 휘어지지 않고 대신 부러진다.
즉 살아 있는 영혼은 잘 번지나, 죽은 영혼은 번지지 않는다.
웃지 않는 얼굴을 보면, 근육이 죽어 있다.
죽은 근육은 아무리 재미난 우스개를 들어도 웃음이 번지지 않는다.

스밈과 어울림, 나눔도 그렇다.
스며야 번지고, 어울려야 함께 나눈다.

우리는 살아있는 영혼, 멋진 웃음 아름답게 번져 가자.

반응형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얀테'의 법칙  (139) 2023.11.17
인생 '돌부리'  (144) 2023.11.16
'거짓말'  (135) 2023.11.14
'인과응보' 詩  (138) 2023.11.13
우리 멋진 할머니  (157) 2023.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