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산문 '이상한 관상쟁이'
'사람이 부귀하면 교만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자라게 되니,
그 죄가 가득 차면 하늘이 반드시 엎어 버리고,
빈천하면 뜻을 겸손히 하고 자신을 낮추어 반성하는 마음이 있게 되니,
막힌 운수가 다하면 반드시 좋은 운수가 돌아온다.'
이상한 관상쟁이
관상쟁이 한 사람이 나타났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관상책을 보지도 않고, 관상법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특이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관상을 봐주었다.
그래서 ‘이상한 관상쟁이’라 불렸다. 귀족들과 높은 벼슬아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남에게 뒤질세라 앞다퉈 맞아들이거나 경쟁하듯 찾아가서 자기의 관상을 봐달라고 청하느라 야단 법석이었다.
그는 매우 특이하게 관상을 보았는데, 살찌고 윤기가 흐르는 부귀한 자를 보면
“당신은 용모가 수척하니, 당신 가족은 참으로 천하게 되겠소.” 하였고,
빈천해서 몸이 바짝 마른 사람을 보면
'당신은 용모가 좋으니, 당신 가족은 참으로 귀하게 되겠소.'
얼굴이 아주 예쁜 부인의 관상을 보고서는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 상이오!”라고 하는 등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정반대로 관상을 보았다.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정반대로 말하니, 사람들은 이 관상쟁이의 말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사기꾼이 아닌가 의심하여 잡아다가 혼을 내주려고도 하였다.
부귀해서, 교만하고 남을 업신여기면 하늘은 반드시 벌을 준다
이규보 선생은 그의 집을 찾아가 그렇게 관상을 본 이유를 정중하게 물어보니,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람이 부귀하면 교만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자라게 되니, 그 죄가 가득 차면 하늘이 반드시 엎어 버려서 쭉정이도 넉넉하지 못할 때가 있게 될 것이므로 수척하다고 한 것입니다. 반대로 빈천하면 뜻을 겸손히 하고 자신을 낮추어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몸을 닦고 반성하는 마음이 있게 되니, 막힌 운수가 다하면 좋은 운수가 돌아와서 고량진미를 먹게 될 조짐이 이미 이르렀으므로 용모가 좋다고 한 것입니다.
저 아름다운 용모는 음란하고 사치스러운 자가 보면 고귀한 구슬처럼 빼어나게 보이지만, 정직하고 순박한 사람이 보게 되면 진흙덩이처럼 추하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 상이라고 한 것이지요.'
'저 어질다고 일컬어지는 분은 죽을 때 곳곳에서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서 그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줄줄 흘려서 마치 어머니를 여읜 어린애처럼 슬퍼합니다. 그래서 만인을 슬프게 할 사람이라고 한 것이지요.
몹시 잔혹하다고 일컬어지는 자의 경우 그가 죽으면 거리마다 노래를 부르고 골목마다 화답하며 양고기와 술로 서로 축하하면서 웃느라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손바닥이 터져라 손뼉을 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만인의 마음을 기쁘게 할 사람이라고 한 것이지요.'
욕심 없고 마음이 깨끗한 장님만이 '눈이 밝은 사람'
'고운 자태와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건드리고 싶게 하고, 진기한 물건과 기호품을 보면 갖고 싶게 하여, 사람을 미혹에 빠트리고 부정한 짓으로 유도하는 것이 바로 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헤아릴 수 없이 커다란 욕을 당하게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자는 눈이 밝지 못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장님만이 마음이 깨끗하여 욕심도 없고 욕망도 없기 때문에 몸을 보전하고 욕됨을 멀리하는 것이니, 어진 사람이나 깨달은 사람보다도 낫습니다. 그래서 눈이 밝은 사람이라고 한 것이지요.'
'夫富貴則驕傲陵慢之心滋。罪之盈也。天必反之。將有糠糲不給之期。故曰瘠也。貧賤則降志貶己。有憂懼修省之意。否之極焉。泰必復矣。肉食之兆已至。故肥也'
이 관상쟁이의 주장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그 사람의 진실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진실한 모습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그가 내면에 품고 있는 마음이고, 이것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감상): 고려 고종 때의 문인인 이규보(1168~1241) 선생이 쓴 글이다.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려 있고, 이후 '동문선'의 문장 선집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
어느 날 사람들 사이에 나타난 이상한 관상쟁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소동이 이 글의 배경이다.
관상을 보는 행위는 낡은 미신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는 현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욱이 사람을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 나아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기에 이 글은 흥미를 더한다. 상식과 통념을 통쾌하게 깨트리기를 좋아하는 이규보 선생 특유의 산문 정신이 살아있는 글이다.
이규보 선생은 '이상한 관상쟁이가 상식과 어긋나고 기대한 바와 다르다고 하여 사기꾼으로 볼 것이 아니다'라며, 그 관상쟁이는 곧이곧대로 ‘낯빛이나 생김새’로 사람의 인생을 재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술사(術士)가 아니라, 인생의 법칙으로 사람의 운명을 개척하고 이끌어가는 인생의 교사(敎師)라는 사실을 대화를 거쳐 이끌어내고 있다.
마치며
사람을 판단하고 인생을 점치는 것은 고금이 크게 다를 수 없는 문제이다.
그리고 인생만이 아니라 복잡한 많은 사회현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는 성형이 필수적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이 얼굴을 예쁘게 만들면 행복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 아름다워야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참고문헌: 이규보(李奎報),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한국고전번역원/동문선 문장선집/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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