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피 끓는 '광해', 시(詩)를 짓다

e길 2023. 8. 2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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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에 쫓겨난 조선 15대 왕 광해군

광해군은 선조 8년(1575~ 1641)에 후궁 공빈 김 씨와 사이에서 둘째 서자로 태어났다. 무난하게 성장한 광해군은, 조정 대신들도 차세대 세자로 인정하는 대세였다. 일본 침략으로 어려운 시기에 분조(分朝) 활동하며 더욱더 인정받게 되고,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위협받자 '선조'는 1592년 긴급히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

 이리하여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왕세자가 되었다. 이후 왕은 피난을 갔는데 광해군은 전국 각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해 왜군을 무찌르고 많은 업적을 쌓는다. 조선이 섬기는 명나라에서도 '조선은 이순신과 광해군이 있다'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나름의 탕평책으로 모두를 아우르며 가려하지만 당파들의 모함과 질시, 권력 싸움 등으로 조정은 혼돈스러웠고, 끝없이 광해군을 흔들다가 결국은 인조 무리들의 쿠데타에 숙청되고 말았다.

 

남양주 진건읍 '광해군의 묘'

 

당파싸움에 휘둘린 광해군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

광해군의 존호이다. 하지만 '인조반정'후 삭탈되었다. '반정'은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키는 혁명을 뜻한다.

 

역사가들은 지금도 광해군에 대해서 여러 이견을 내놓고 있다. 성공한 쿠데타 세력인 '인조'와 그 세력들은 유리한 역사를 썼으며, 광해군을 '금수'로 규정하고 축출한 3가지 이유(영창대군 독살과 인목대비 유폐, 지나친 궁궐 공사, 명나라에 '배은망덕') 도 뚜렷한 증거가 없거나 타당한 정치행위라고 주장하며, 심한 당파싸움으로 광해군이 휘둘려서 선정을 할 수 없었다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독살과 유폐는 '광해군의 패악'이라는 학자들의 견해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세 번째 이유인 명나라에 '배은망덕'은 명나라 은혜를 잊지 말고 돕자는 대신들과 달리,

광해군은 몰락해 가는 '명'과, 신흥 강자 '후금'의 누루하치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폈다. 하지만 새 정권의 

인조는 망해가는 명을 받드는 '친명배금(명을 섬기고 금을 배척)' 정책으로, 다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그래서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이 이어지고 급기야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다.

 

광해군을 평가할 위치도 아니고, 공로와 실정, 잘잘못의 역사는 학자들의 몫으로 남기며, 다만 왕에서 쫓겨난 후, 배를 타고 유배지를 향해 가는 '광해군' 한 인간으로서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시를  감상해 본다.

 

<강화도 교동에서 제주도로 유배될 때 지은 시> 광해군. 시

風趣飛雨過城頭 풍취비우과성두: 바람 불고 비는 날리는데 성 머리를 지나네.

獐氣熏蔭百尺摟 장기훈음백척루: 독한 기운 응달에 오르니 백 척 누각이라

 

滄海怒濤來薄暮 청해노도래박모: 푸른 바다에 파도는 사나운데 땅거미가 내리고

碧潼愁色 帶淸秋 벽동수색 대청추: 푸른 산의 슬픈 기색은 싸늘한 가을이구나

 

歸心厭見王孫草 귀심염건왕손초: 가고픈 마음에 질리도록 왕손초를 보았지만

客夢頻驚 帝子州 객몽빈경 제자주: 나그네 꿈은 어지러이 제자주에 깨이누나

 

故國存亡消息斷 고국존망소식단: 고국의 존망은 소식마저 끊기고

裀波江上臥孤㵵 인파강상와고추: 안개 낀 강위의 외딴 배에 누웠노라

 

(감상망망대해 가는 곳도 모르고 비는 내리는데 '강제로 태워진 배'에서, 처참한 신세를 상심한 어투로 힘없이 말하고 있다. '독한 기운의 응달, 슬픈 싸늘한 가을, 안개 낀 외딴 배 등이, 피가 솟구치는 분노와 고독한 인생무상을 표현하고 있다.   '누란에 빠진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는 시'로 듣는 사람들이 비감에 젖었다고 한다.

 

강화도 교동도에서 배를 타고 떠났지만 광해군은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고 한다. 이동 과정에서 배에 장막을 둘러쳐서 향하는 장소를 알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도착한 후에야 유배지가 오지나 다름없는 제주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광해군은 매우 당혹스러워하며 '어째서 이런 곳에! 도대체 어째서'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광해군의 외아들 '이지(李䘭)' 폐세자의 유배길에서 시(詩)

400년 전 1623년 음 3월 13일 '인조반정'의 쿠데타로 광해군은 폐위되고, 세자인 '이지(1598~ 1623)' 부부도 3월 21일 교동도(강화)로 위리안치(유배지 가시 담장 안에서 가택연금)된다. 패기왕성한 세자부부는 보름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했고, 함께 목을 매었다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이후 인조는 '반정 세력'의 강요에 못 이겨 '자진하라'는 명을 내린다. 조선의 만백성을 책임질 왕과 왕비의 꿈을 키워갔던 폐세자 부부는 '26살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끊었다'라고 '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의 아들 '이지' 폐세자가 26세 때 유배길과 유배지에서 지었다는 시가 가슴 찡하다.

<26년의 한바탕 꿈(二十六年眞一夢)> 이지. 시

 

..... 26년은 참으로 한바탕 꿈이어라.

흰구름 사이로 돌아가리.

 

본시 한 뿌리인데

어찌 이다지 박대하는 고

 

... 어떻게 이 새장 벗어나

녹수청산 마음대로 왕래하랴.

 

(감상: 26세 젊은 나이에 폐세자가 되어 생을 마감하는 처참한 상황이다. 당파 대신들의 끈질긴 요구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폐세자의 찢어지는 마음을 '한바탕 꿈'이라고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땅굴을 파고 도망치다 잡히고 한 많은 일국의 세자의 참담한 모습에서 '권력의 덧없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

 

마치며: 음력 7월 1일 '광해우'

광해군은 유폐 생활 19년 만에, 제주도에 온 지는 4년 만인 1641년 음 7월 1일에 6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5년 동안 왕으로 재임한 기간 보다 더 많은 19년을 유배로 처참하게 여생을 보냈다. 인조실록에 보면 제주목사 이시방은 자신이 제주(帝主)를 맡아 제주 향교의 교생을 뽑아 집사를 맡겨 음력 7월 4일 시신을 입관했다. '인조'는 예조참의 채유후를 보내 장례 주관을 맡겼다. 채유후는 7월 27일 제주도에서 대제(大祭)를 거행하고, 남양주까지 총 3개월 걸려 시신을 운반했는데, 한여름임에도 신하들의 노력으로 전혀 부패되지 않게 운구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역대 군주 중에 제주땅을 밟은 유일한 군주였다. 제주도에서는 음력 7월 1일을 '광해우(光海雨)'내리는 날이라고 부르는데, 광해군이 서거한 날, 맑은 하늘에 갑자기 비구름이 몰려와 비를 흩뿌린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인조실록/ 광해군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경향신문/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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