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조선 3걸, 광해군의 영의정 '정인홍'

e길 2023. 8. 29.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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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3 걸 이순신, 을지문덕, 정인홍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신채호 선생은 '조선 3 걸'로 이순신, 을지문덕과 함께 '정인홍'을 꼽았다. 옥중에서 홍명희에게 전달한 친서에서도 필생의 저서인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이 세상에 빛을 보이지 못 함을 아쉬워했다. 정인홍은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체포되어 죽음을 맞는다.

 

정인홍 선생(1535~ 1623(인조 1년)은 합천 가야 출신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영의정, 의병장을 지냈다.

 조선 500년 동안  영남(경상도)에서 영의정을 지낸 인물은 하동의 '하륜', 안동의 '유성룡', 합천의 '정인홍' 3명뿐이다.

 

'탑'보다 키 작은 소나무는 성장해서 탑 보다 더 커졌다.

 

<탑(塔) 가의 왜송(矮松 탑 옆에 있는 키 작은 소나무)> 정인홍. 시

 

短短孤松在塔西: 짧고 짧은 외로운 소나무가 서쪽에 서 있으니,

塔高松下不相齊: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서 서로 가지런하지 않네.

谟言今日孤松短: 오늘날 외로운 소나무가 짧다고 말하지 마오.

松長他時塔反低: 소나무가 자란 다른 날에 탑이 도리어 짧으리.

 

(감상: 정인홍은 어릴 때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었는데, 마침 그 도의 감사(監司)가 밤에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찾아갔더니 바로 과부집 어린아이였다. '탑(塔) 가의 왜송(矮松)'으로 시(詩)를 지어보라고 하자 즉석에서 지어낸 시다. 감사는 깜짝 놀라 감탄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고 한다.

 '크다고 너무 으스대지 마시오. 좀 있으면 작은 소나무가 자라서 '탑'보다 더 크게 성장할 것이오')

 

내암 선생이 45세 되던 해(1580년, 선조 13년), 생가 바로 옆에 작은 집을 짓고 '부음정(孚飮亭)이라 하였는데, 부음정은 '술을 마심에 믿음이 있으면 허물이 없다'라는 뜻이다. 

 

'성현의 글을 읽고 지난날의 훌륭한 언행을 알며, 절친한 벗들이 찾아와 서로 학문을 힘쓰게 하는 것이 마시는 밑천이다. 산에 걸친 구름, 물에 뜬 달, 흐리고 개는 변화의 모양은 마실 때의 안주이다. 술을 마신다는 건 누룩으로 빚은 술에 의해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을 비유한 게 아니다'

 

정인홍 선생은 강직하고 청렴한 성리학자로서 기개와 절개 및 지조를 숭상한 인물로 전해진다. 강직한 주관으로 정사에 임했지만 그 뚜렷한 강직함에 반대파와 심한 대립각을 세웠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반대파들에게 숙청을 당하며 목숨을 잃었다.

 

왕에게도 강직하게 할 말 다하는 신하

선조에게도 대놓고 '광해군에게 빨리 왕권을 넘겨라. 당신이 도망 다닐 때 광해군이 목숨을 걸고 왜적을 물리치지 않았느냐, 백성들은 이미 광해군을 군주로 칭송한다. 나라 망하기 전에 퍼뜩 내려와라.'라고 신랄하게 내뱉은 듯한 비판 문장으로 상소를 올린다.

 

이에 선조는 '이 자식이 미쳤나, 아주 미친놈 이구만. 목이 두 개나 되는 모양이지'하면서 노발대발한다. 그러면서 '야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놈아, 광해는 중국 황제에게 '세자' 허가도 못 받은 놈이야'하면서 길길이 뛰고 무진장 욕을 해대며 '정인홍'을 유배지로 추방하는 형벌을 내린다.

 하지만 유배지로 떠나기 전 선조가 사망해서 자동으로 정인홍 선생은 형벌이 면제되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 3월 13일 쿠데타가 성공하자 정인홍 선생은 바로 체포되어 3월 28일 한성부로 압송돼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한다. 쿠데타로 집권한 '서인'들은 '폐모론을 주장했고, 괴기한 학문을 퍼트렸으며, 이언적 이황을 배척했다'는 죄명을 씌워, 그런 사실이 없다고 강변하는 '정인홍'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는 '정승을 지내고, 80세 이상의 고령자는 참수형에 처하지 않는다'는 대명률을 어기고 '서인 정권'은 참수를 단행한 것이다. 그때 의병장, 영의정을 지낸 내암 정인홍의 나이는 88세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는 백발의 노년이었지만 '대북'파의 정신적 지주인 정인홍을 쿠데타 집권세력인 '서인'파가 가만 놔두지 않고  참형을 시킨 것이다.

 

집권당 '서인'파들의 시퍼런 서슬에도 정인홍을 존경하는 자들이 100여 년 동안 그의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결국 순종 때인 1908년 그의 공이 인정되어 다시 복권되었고 영의정 관직도 복위되었다.

 

마치며

그 스승에 그 제자답게 내암 선생은 스승인 '남명'선생이 중종과 명종 선조 대에 걸쳐 열두 번의 벼슬을 사양했듯, 내암 정인홍 선생도 정1품인 우의정을 열다섯 차례, 좌의정 한차례, 영의정을 세 차례나 사양하며 고향 합천에 은거하며 끝내 나가지 않았다.

 

정인홍 선생은 진정한 의리의 사나이였다.

의병으로 국가에 대한 의리를 지켰고,

스승을 끝까지 존경하는 의리를 지켰으며,

왕에 대한 의리로, 광해군을 보필한 죄로 모든 책임을 다 짊어지고 목숨으로 의리를 지킨 것이다.

 

(참고문헌: 인조실록/ 광해군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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