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최초의 '이미지즘' 시인 정지용

e길 2023. 5. 23.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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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은 1930년대 세계에서 유행하던 '모더니즘'을 한국에 소개하고, 모더니즘의 한 갈래인 '이미지즘'을 최초로 구사한 시인이다. 명료하고 견고한 이미지가 중심이 되어 객관적으로 냉정히 묘사한다. 시어도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언어로 사물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명확한 이미지를 전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정지용, 김기림, 김영랑, 오장환, 이상, 이상화, 백석, 서정주, 유치환, 이육사, 윤동주 시인 등이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들이다.

 

고향

유리창 1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카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눈물로 '물먹은 별'이 반짝인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ㅅ새처럼 날려 갔구나!

(폐결핵으로 죽은 아들의 슬픔을 표현한 시로, 유리창을 보며 기억을 통해 아들을 보려고 입김을 불며 닦아 보지만, 실제로는 만지거나 이야기하지 못한다. 유리 사이로 보이지만 잡을 수도 없다. 아들의 얼굴을 만지는 심정으로 유리창을 닦아도, 보이는 별은 화자가 울어서 '물먹은 별'이 된다. 유리창을 매개로 죽은 아들의 환상을 대할 수 있는가 하면, 유리창의 단절 때문에 그 환상과 현실을 갈라놓는 '유리창'의 모순된 존재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안으로는 뜨거운 감정이지만 겉으로는 서늘하고 차분하게 감정의 속성을 드러내지 않는 '감정의 절제'를 드러낸다)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어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ㅡ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ㅡ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ㅡ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21살 때 쓴 초기 작품으로 고향에서 '넓은 세상으로' 감각적, 회화적, 향토적인 언어구사를 통해 인간의 공통된 정서인 '향수'를 한가로운 고향의 정경을 통하여 한 폭의 풍경화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그의 모더니즘 시의 대표작이다. 특히 감각화된 이미지들과 아름다운 우리말 시어들이 이 시의 서정적 승화애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난 고향의 풍경과 삶의 모습은 개인의 체험에서 벗어나 민족의 보편적 정서에 닿아 있음으로써 공통적인 감동을 느끼게 한다. 인간에게 존재의 원천이자 삶의 안식처인 고향이라는 대상을 독특한 감각과 향토적 서정을 바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마치며

사물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서, 그 감각을 그림 그리듯이 언어로 표현하는 이미지즘 시인 정지용은, 시는 무엇보다 '언어'가 밑바탕이 되고 성립되는 것을 강조한 최초의 시인이었다. 그 전의 시들이 내용과 리듬을 중시했다면, 우리말의 단어와 단어의 특이한 결합에 의하여 언어의 향기를 빚어내는 점을 강조했다. 최남선을 한국 현대시의 최초의 작가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최초의 현대시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지용 시인이야말로 '시란 언어로 만들어진다'는 평범하나 중요한 진리를 자각하고 실천한 최초의 시인이었다. 그가 구사한 언어는 창의적이고 개성적이어서, 민족어 위기의 시대에 그처럼 '민족어'를 찾아내고 갈고닦은 사람은 그 이전에는 없었다. 시인은 언어의 중요성과 회화성으로, 감정과 언어의 절제라는 특징으로 시정신을 규현 해낸 최초의 이미지즘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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