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의 '시계를 죽임'은, 쉽게 잠을 못 드는 어느 직장인의 예민해진 불면의 밤에 '벽시계' 소리와 , 백석 시인의 '여승'은, 쉽게 잊지 못하는 죽은 딸 생각과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회한하는 시다. 두 시인은 1930년 동시대에 활동했고, 전통을 중시했으며, 일본 유학, 영문학 전공이라는 공통점이 많다. 또한 후진 양성과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으로 한국 문학사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부분도 비슷하고, 하지만 시의 구사는 서로 많이 다르다. '시계를 죽임'과 '여승'으로 두 시인의 '시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백석 시인의 '여승'
(이 시의 화자는, 평안북도 어느 금광판 시장에서 옥수수를 샀던 여인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시적 화자인 '나'가 시적 대상인 '여승'의 아픔을 사실적인 감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리얼리즘' 시이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 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어린 딸은 도라지 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서글픈 딸의 죽음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사회 공동체가 무너지고, 가족들도 헤어져 살아야 하는 모습을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금광으로 떠난 남편은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산 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속세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면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죽은 딸의 영혼을 눈물에 담아낸다. '설게'는 '서럽게'의 평북 방언으로 '너무 서럽다'는 것을 강조하는, 백석 특유의 고향을 사랑하는 방언으로 표현했다. 서사적 , 회상적으로 여인의 비극적인 삶과 애환을 표현한 작품이라 하겠다. 4연으로 구성된 자유시로 내재율을 지니고 있으며, 서사적으로 구성한 서정시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 여인의 불행한 일생을 제재로 삼아, 삶의 애환을 감각적인 어조로 형상화한 사실주의적 시이다.)
정지용 시인의 '시계를 죽임"
한밤의 벽시계는 불길한 탁목조! / 나의 뇌수를 미신 바늘처럼 쪼다
일어나 쫑알거리는 '시간'을 비틀어 죽이다./ 잔인한 손아귀에 감기는 가냘픈 모가지여!
오늘은 열 시간 일 하였노라./ 피로한 이지는 그대로 차차를 돌리다.
나의 생활은 일절 분노를 잊었노라./ 유리 안에 설레는 검은 곰인 양 하품하다.
꿈과 같은 이야기는 꿈에도 아니하련다./ 필요하다면 눈물도 제조할 뿐!
어쨌든 정각에 수면하는 것이/ 고상한 무표정이요 한 취미로 하노라!
명일 일자가 아니어도 좋은 영원한 혼례!/ 소리 없이 옮겨가는 나의 백금 체펠린의 유유한 야간 항로여!
('한밤에 벽시계는 불길한 탁목조(딱따구리)'. 잠이 오지 않는 밤, 혹은 잠이 막 들려는 순간의 시계 소리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준다. 이런저런 생각에 늦게 잠을 청하거나 고민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일 때, 째깍째깍 소리는 한숨이 절로 나오며, 일어나서 꺼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가 있다. 당시 벽시계는 소리가 더 컸을 텐데, 그 불면의 밤 잔인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를 재봉틀 바늘에 뇌수를 쪼아대는 것에 비유하여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니, 참으로 공감이 가는 탁월한 시적 표현이라 하겠다. 정지용 시인이 이 시를 쓸 무렵에 자신의 모교인 휘문에서 교사로 재임했으니 잠을 못 자면 날카로워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요즈음 아무 때나 웅장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 카톡 소리의 소음 공해를, 정지용 시인께서 시계와 비유해서 미리 만든 작품이 아닐까,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본다.)
정지용 시인의 모더니즘과 백석 시인의 리얼리즘
정지용 시인과 백석 시인은 교사로 재임하며 학생들을 가르친 공통점이 또 있다. 윤동주 시인은 백석시인의 시를 필사해서 다닐 정도로 좋아했으며, 정지용 시도 너무 좋아하고, 자신은 많이 부족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시인들의 찬사와 존경을 받는 부분도 두 분은 비슷하다. 하지만 시의 구사는 서로 달랐다. 정지용 시인은 서구의 사물을 비유하고 깔끔한 시어와 주로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모더니즘으로 구사하였다면, 백석 시인은 토속적인 사물을 구사하고 구체적인 시어와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 다양한 이미지 구사를 리얼리즘화 하였다. 그 예로 정지용 시인의 '시계를 죽이다'의 '시계'와 '체펠린' 등의 서구의 사물을 시각, 청각 이미지로 그렸다면, 백석 시인의 '여승'에서는 '가지취'의 취나물, 옥수수, 산꿩 등 토속적인 사물을 구사했다. 시의 구사는 달랐지만 한국 문학사에 빛나는 많은 작품들로 큰 발전을 이루게 한 공로는, 두 시인의 큰 업적이자 공통점이고, 자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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