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정록 시 "정말" 너무 빠른 신랑!

e길 2023. 9. 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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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만 재미있는 시(詩)

일찍 작고하신 남편의 슬픔을 역설적이고 유머스러 하게, 풍자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혹자는 야한 시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짠해지며 전혀 외설스럽지 않고 잔잔한 감동이 밀려오는 시다.

 

창비시선 '그럴 때가 있다'


<정말> 이정록. 시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 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 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감상참 재미있는 시다. 어쩌면 시인은 이토록 슬픈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처음에는 일찍 저세상으로 간 신랑 이야기로 시작된다. 돌아가신 분이 성격이 참 급했나 보다.
그리고 다음에는 두 분이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얼마나 급했으면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마시고, 오토바이에 맞선녀를 번쩍 안아서 태웠을까. 오토바이에 태웠으니 남정네의 등에 여자의 가슴이 스치면서 피가 쏠렸다는 표현도 재미있다. 젊은 혈기에 얼마나 피가 끓었을까, 그것도 바야흐로 봄날인데 말이다.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 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정말 한 순간에 모든 운명이 결정되고

슬픔은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읽는 내내 입가에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더 웃음이 터진다.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얼마나 빨리 끝났으면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었을까?
그야말로 기가 막힌 표현이다.
그런데 또 바로 이어서,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가 나온다.

분명 슬픈 이야기인데 어쩜 이렇게 슬픔을 순간적인 웃음으로 바꿔버리고 만다.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워낙 첫 기념행사를 빨리 끝내신 양반이라,
가정용도 안되었으니, 어떻게 상업용이 되었겠냐는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마무리는 정말 '날랜 양반'이라는...

남편을 빨리 보낸 슬픔을 웃게 만드는 시인 필력의  힘에 정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이정록(1964~) 시인은 충남 홍성 출신이고 37년 동안 교직에 있었으며, '동심언어사전', '의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시집 '그럴 때가 있다'에서도 이정록 시인의 유머와 재치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팔순'에서 버스기사와 할머니의 대화인 유쾌한 '대거리'는 이정록 시인의 득의의 '장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기사 양반, 잘 지내셨남?

무릎 수술한 사이에

버스가 많이 컸네

북망산 보다 높구먼"

 

무릎 수술을 하고 오랜만에 버스에 타는 할머니의 말이다. 이에 기사는 검버섯 핀 할머니의 얼굴을 가리키며 

"여드름이 거뭇거뭇 질 익은 걸 보니께

서른은 넘었쥬? 라며 받는다.

"민증은 집에 두고 왔는디'

골다공증이라도 보여줄까?라는 할머니와

"성장판 수술했다면서유'라고 대꾸하는 기사와의 대거리는, 시인의 유머와 재치를 잘 표현하는 대목이다.

 

<그럴 때가 있다> 이정록. 시 (부분)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중략)

촛불이 깜빡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감상: 시집 표제작의 첫 연과 마지막 연이다. 무심코 지나칠 법한 일상의 짧은 순간을 날렵하게 포착한다.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은데, 그 들 사이에 연대와 공감의 다리를 놓는 솜씨가 대단한 것 같다. 시인의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위키백과/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이정록 '그럴 때가 있다' 시집/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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