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상의 수필, 여름 날의 "권태"

e길 2023. 8. 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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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날의 권태

스물일곱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 한국 현대시 최고의 실험적 모더니스트이자 한국 시사 최고의 '아방가르드' 시인, 소설가, 수필가다. 한국 소설의 전통시학에 변혁을 가져다준 문학사상 획기적인 작품 소설 '날개'와 시집으로 '이상 선집'이 있다.

 

폐결핵으로 요양 중인 뜨거운 여름날 모든 일상과 단조로운 인물들을 보면서 권태를 느낀다는 글이며, 주변 환경에 대한 심리묘사가 뛰어난 경수필이다.

 

자, 우리도 이제 깡촌으로 가서 이상 작가가 펼쳐 놓은 시골마을을 경험해 보자. 작가의 시선으로, 이 뜨거운 여름을 느껴보자.

 

이상의 수필 '권태'

 

<권태> 이상. 수필(부분)

 

어서ㅡ 차라리ㅡ 어둬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ㅡ 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八峯山).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밥싸리 나무 오늘도 보는 김 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신둥이 검둥이.

 해는 100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 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염서(炎署)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널다란 백지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중략)

 

 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다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내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나는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ㅡ 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思索)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열한 곡예(曲藝)의 역(域)을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본다.

 

지구 표면적의 백 분의 구십구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 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漂着)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되어서 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沒趣味)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이윽고 밤이 오면 또 거대한 구렝이처럼 빛을 잃어버리고 소리도 없이 잔다. 이 무슨 거대한 겸손이냐.

(중략)

 

댑싸리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덩이를 만나면 썩는다. 내가 않아 있는 데는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 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려왔으니까 그저 들었달뿐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십 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천 리나 먼 데서 온 외인(外人)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蓬髮)이 작소를 이룬 기이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도 희귀한 겸손한 겁쟁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쟁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여인(旅人)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도 연변에 있지 않는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 마을의 김 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적이 없다. 인정 있는 도적이면 여기 너무나 빈한한 새악씨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盜心)을 도적맞기 쉬운 위험한 지대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 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왔다. 몇 대를 두고 짖지 않은 이곳 견족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인제는 돌이나 나무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느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들 것은 못 되리라.

 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 우고 있는 집 문간에 가 앉아서 밤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은 수위(守衛) 할 아무 대상도 없으니까다. 

 최 서방네 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 서방네 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 본댔자 할 일이 없다. 양구에 그들은 헤어진다. 

 설레설레 길을 걸어본다. 밤낮 다니던 길, 그 길에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풋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은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 수 있으랴.

 길을 걸어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개들은 천부(天腑)의 수위술(守衛術)을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바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 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전연 알 길이 없다. (중략)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이, 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또 한판 두지. 웅덩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 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 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大小)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돌오돌 떨고 있을 뿐이다.

 

(감상:여름날 한 깡촌의 똑같은 풍경과 똑같은 일상에 대한 사실적인 관찰이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수필은 원래 한낮에서부터 밤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일곱 단락으로 짜여 있다.

 일상적인 생활과 변화 없는 주변 환경 속에서 느끼는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자연이나 대상을 심리적 정신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작가의 세계로 형상화하고 있다.

 제목 '권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수필은 생활 속에서 느끼는 권태가 핵심을 이룬다. 결국 일상적 생활의 단조로움에서 오는 권태라는 것은 삶의 목표와 적극적 가치 의식이 없는 데서 오는 권태일 것이다. 

 

도회지에서 생활해 본 작가의 경험은 처음 며칠간을 제외하면 한 여름 벽촌의 생활은 무료하기 짝이 없다. 모두 푸른 자연과 똑같은 소수의 사람들을 봐야 하는 단조로움이 권태를 일으키게 만든다. 하지만 무심코 툭툭 던지는 사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이 왜 '이상'인가를 잘 보여준다. 여름 시골 '개'들의 행동, 성격, 왜 짖지 않은지 심리 상태까지 세밀하게 수려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명 수필이다.)

 

마치며

이'권태'는 평남 성천 '팔봉산' 근처에서의 산골 생활을 바탕으로 쓴 수필이다.

 이상은 몸이 아픈 관계로 시골에 있는 친구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도시처럼 볼거리나 재미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은 아프고 마땅히 할 일도 없고, 무료했을 것이다. 특히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고  짜증이 나게 되어 있다. 똑같은 일상에 얼마나 따분하고 권태로웠겠는가.

 

'어쩌자고 저렇게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여름날 산과 벌판은 모두 초록색이다. 이상 작가의 짜증과 권태를 한마디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참고문헌: 1936년 조선일보/ 김해경 '이상선집'/ 구글/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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