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딜레탕티즘(DILETTANTISME)" 김진섭의 수필

e길 2023. 7. 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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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론을 정립한 '김진섭'의 '딜레탕티즘(향락주의)' 수필은 1940년대에 하나의 문학적 형태로 인식되었다. 김진섭 작가의 수필은 '생활'에서 근원적인 가치를 추출하려는 사색의 산물이다. 생활에서 착안해 철학적 성찰로 이어지는 무형식의 글쓰기는 김진섭 수필의 특징이며 현대 수필의 본질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김진섭 수필집 '인생 예찬'

 

조선일보 대담 자리에서 '이헌구' 평론가의 물음에 김진섭 작가는 '수필을 주관의 원리에 의해 형성되는 양식으로 설명하였다.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지식이 인간에 대한 의미에 따라서 소설가와 같이 사람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자기의 주관에 의해서 볼 때에 거기 여러 가지 종류의 글이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나오는 글을 수필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픽션(허구성)으로 등장 '인물'을 창조하지만, 수필은 자기 자신의 주관으로 쓴 글 즉, 수필은 자기 신변과 심경을 아울러 '고백'하는 데 있어 형식적 의장을 걸친 소설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장르로 이해된다.

 소설의 수필화 현상은 1930년대 말~ 1940년대 초라는 역사적 상황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표현하는 부분에서 수필이 갖는 장점 때문이다. 시, 소설, 희곡 등의 글쓰기에서, 수필은 그런 장르의 기본이 되는 바탕이 되고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백설부> 김진섭. 수필

 

말하기 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도회인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눈을 즐겨하는 것은 비단 개와 어린이들뿐만이 아닐 것이요, 겨울에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일제히 고요한 환호성을 소리 높이 지르는 듯한 느낌이 난다.

 눈 오는 날에 나는 일찍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통행인을 거리에서 보지 못하였으니, 부드러운 설 편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지릴때, 우리는 어찌 된 연유인지, 부지중 온화하게 된 색채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에게 경쾌한 목례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겨울의 모진 바람 속에 태고의 음향을 찾아 듣기를 나는 좋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는 백설,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니, 겨울이 익어가면 최초의 강설에 의해서 멀고 먼 동경의 나라는 비로소 도회에까지 고요히 고요히 들어오는 것인데, 눈이 와서 도회가 잠시 문명의 구각을 탈하고 현란한 백의를 갈아입을 때, 눈과 같이 온 이 넓고 힘세고 성스러운 나라 때문에 도회는 문뜩 얼마나 조용해지고 자그마해지고 정숙해지는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이때 집이란 집은 모두가 먼 꿈 속에 포근히 안기고 사람들 역시 희귀한 자연의 아들이 되어 모든 것은 일시에 원시 시대의 풍속을 탈환한  상태를 정한다.

 

온 천하가 얼어붙어서 찬 돌과 같이도 딱딱한 겨울날의 한가운데, 대체 어디서부터 이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은 아무 소리도 없이 한들한들 춤추며 내려오는 것인지, 비가 겨울이 되면 얼어서 눈으로 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만약에 이 삭연한 삼동이 불행히도 백설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의 적은 위안은 더욱이나 그 양을 줄이고야 말 것이니, 가령 우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추위를 참고 열고 싶지 않은 창을 가만히 밀고 밖을 한 번 내다보면, 이것이 무어랴, 백설애애한 세계가 눈앞에 전개되어 있을 때, 그때 우리가 마음에 느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중략)

 우리의 온 밤을 행복스럽게 만들어 주기는 하나,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감미한 꿈과 같이 그렇게 만족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한 번 내린 눈은, 그러나 그다지 오랫동안 남아 있어 주지는 않는다.

 이 지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슬픈 일이나 얼마나 단명하며 또 얼마나 없어지기 쉬운가! 그것은 말하자면 기적같이 와서는 행복같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편연 백설이 경쾌한 윤무룰 가지고 공중에서 편편히 지상에 내려올 때, 이 순치할 수 없는 고공무용이 원거리에 뻗친 과감한 분란은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처연한 심사를 가지게까지 하는데, 대체 이들 흰 생명들은 이렇게 수많이 모여선 어디로 가려는 것인고? 이는 자유의 도취 속에 부유함을 말함인가? 혹은 그는 우리의 참여하기 어려운 열락에 탐닉하고 있음을 말함인가? 백설이여! 잠시 묻노니, 너는 지상의 누가 유혹했기에 이곳에 내려오는 것이며, 그리고 또 너는 공중에서 무질서의 쾌락을 배운 뒤에, 이곳에 와서 무엇을 시작하려는 것이냐? 

 천국의 아들이요, 경쾌한 족속이여, 바람의 희생자인 백설이여! 과연 뉘라서 너희의 무정부주의를 통제할 수 있으랴? (중략)

 말라붙은 풀포기, 앙상한 나뭇가지들조차 풍만한 백화를 달고 있음을 물론이요, 괴벗은 전야는 성자의 영지가 되고, 공허한 정원은 아름다운 선물로 가득하다. 모든 것은 성화되어 새롭고 정결하고 젊고 정숙한 가운데 소생되는데, 그 질서, 그 정밀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며 영원의 해조에 대하여 말한다.

 이때 우리의 회의는 사라지고, 우리의 두 눈은 빛나며, 우리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느끼면서, 위에서 온 축복을 향해서 오직 감사와 찬탄을 노래할 뿐이다.(중략)

 그러나 불행이 우리의 눈에 대한 체험은 그저 단순히 눈 오는 밤에 서울 거리를 술집이나 몇 집 들어가며 배회하는 정도에 국한되는 것이니, 생각하면 사실 나의 백설부란 것도 근거 없고 싱겁기가 짝이 없다 할밖에 없다.

(감상: 자연적인 아름다운 '눈'과 눈 덮인 세계를 예찬하고 있다. 눈이 내리는 모습과 눈 덮인 세계를 작가의 주관대로 자유롭게 보았으며, 끝없는 상상력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과 이국적인 동경을 자유분방하게 진술하고 있다. 도시에 내리는 눈을 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봄직한 것들을 작가 특유의 유려한 문체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감각으로 보면은 어려운 한자어 사용과 관념적 표현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대상을 정밀하게 관찰하여 그것에 대한  작가의 개성적 사고를 드러낸 점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눈에 대한 예찬인 경수필로, 다양한 비유를 통해 대상을 제시하고 있으며, 문장이 끝나지 않는 긴 문장으로 상념의 궤적을 주는 '만연체' 사용이 많으며, 한문의 사용으로 장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또한 크나큰 철학적 깊이의 질문들을 눈을 통해 끄집어내며, 마지막 문단은 '자기 겸손'으로 끝맺음을 한다.)

 

<청빈예찬> 김진섭. 수필(부분)

 

사람이 부자이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많이 가져야 되고, 사람이 가난하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적게 가져야 되느냐? 그러나,  물론 이것을 아는 이는 없다. 보라! 이 세상에는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대단한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가난하다 생각하며, 사실에 있어 또 이 느낌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도배(도둑떼)는 허다하지 않은가? 그들은 어느 날에 이르러도 자족함을 알지 못하고, 전련히 필요치 않은 많은 것을 요망한다. 말하자면 위에는 위가 있다고 할까, 도달할 수 없는 상층만을 애써 치어다보곤, 아직도 자기에게 없는 너무나 많은 것을 헤아리는 것이다. 포만함을 알지 못하고 '충분타'하는 아름다운 말을 이미 잊은 바, 그러한 도배를  사람은 도와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또 보라! 이 세상에는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넉넉타 생각하여, 사실에 있어 또 이 느낌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허다치 않은가? 이 사람들에겐 명색이 재산이라 할 만한 것이 없음은 물론이요, 대게는 손으로 벌어서 입으로 먹는 생활이 허락되어 있을 뿐이다. 

 

(감상: 수필은 어떤 형식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서정이나 사색과 성찰을 산문으로 표현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수필은 소설의 서사성을 침식하고, 시의 서정성을 차용하기도 하면서 무한한 제재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청빈예찬'은 작가의 투철한 통찰력과 정서적 이미지를 생생하고 독특하게 담았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객관적 진술의 서술이 아니라 비평과 해학을 겸한 재미있는 수필로 쓴 작품이다.

 

작가는 '청빈예찬' 끝 부분에서 두 가지 빈궁을 지적한다. '밑바닥에 사람이 없음으로 생존에 대한 권리를 잃고 참으로 가난한 '물질적 빈궁'과, 아름다운 다른 이 세상을 이해치 못하며 탐욕만 추구하는 참으로 가난한 자들의 '정신적 빈궁'을 이야기한다.)

 

마치며: '경건한 생활'의 김진섭 작가

 

김진섭 작가는 우리나라 처음으로 본격적인 수필을 개척한 작가로 수필문학을 정립하였고, 당시 '이양하' 작가와 수필문단의 쌍벽을 이루었다. 그의 수필은 서정적이나, 환상을 배제하고 사색적이고 논리적인 수필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목포 출신으로 성균관대와 서울대에서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 되었다. 김진섭 작가는 일생 동안 딜레탕티즘(향락주의)으로서의 수필에 진력했으나, 그 소재이자 주제가 된 생활에 대해서는 결코 '딜레탕트'가 될 수 없었다. 이는 그가 경건한 생활자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수필의 주요 특징은 숨김없이 자기를 말한다는 것과, 그 속에 무엇을 담아도 좋은 작가의 용기와 자유라고 하겠다. 수필은 단적으로 쓴 사람 자신을 표시하며, 거기에는 특별하고 고유한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

 

 

 

(참고문헌: 조광(1939년), 수필집 '인생예찬',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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