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디 보이(Dandy Boy)
박인환 선생은 1950년대 우리나라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이다.
훤칠한 키에 용모가 수려한 시인은 당대 최고의 멋쟁이로 '댄디 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서구 취향의 도시적 감성으로 무장한 시인은 시 작품에서는 누구보다도 앞서간 날카로운 모더니스트였다.
명동의 술집 마담들도 늘 외상술을 마시는 미남자 박인환 시인을 차마 미워하지 못했다.
'또 외상술이야',
'아이고 그래서 술을 안 주겠다는 거야'
'내가 언제 술을 안 주겠다고 했나'
'걱정 마, 꽃 피기 전에 외상값 깨끗하게 청산할 테니까'
시인은 늘 호주머니가 비어 있었지만, 한 점의 비굴함도 없이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지금이야 '무전취식'으로 잡혀 가지만, 당시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시대 상황이라 통하는 일이었다.
1956년 이른 봄, 명동 한 모퉁이에 주로 막걸리를 파는 예술인들 단골인 경상도집이라 불리는, 최불암 탤런트 어머니가 사장인 '은성'에, 박인환 시인을 비롯한 언론인 송지영, 이진섭, 김광주(소설가 김훈의 부친), 김규동 시인 등 문인들이 모여 술자리를 하고 있었다. 옆자리에는 가수 나애심이 있었다. 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은 나애심 가수에게 노래를 청했는데 마땅한 노래가 없다고 거절당했다.
명동 엘레지
이때 박인환 시인이 종이를 꺼내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 갔다. 그리고 이진섭에게 넘겼고 즉석에서 악보를 붙여 나애심은 그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 노래가 바로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이었다. 몇 시간 후 나애심이 돌아가고 테너 임만섭, 이봉구 소설가 등이 합석을 했는데, 임만섭이 정식으로 다듬어서 부르자 지나가던 행인들까지 모여들어 기이하게 음악회가 되었다고 한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지금은 명동에 그 추억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없지만, 당시에 '명동 백작'이라 불리는 예술가들이 명동 골목마다 모여, 외로움의 회상이 담긴 이 노래를 '명동 엘레지'라고 부르며 애창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 해 1956년 향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박인환 시인은 심장마비로 우리 곁을 떠났다.
시인은 갔지만 그의 시 작품과 노래는 영원히 우리 곁을 함께 하고 있다.
<세월이 가면> 박인환 시. 박인희 노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감상: 당시 예술인의 거리 명동.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즐거운 속삭임과 웅성거림 속에, 명동 골목 양쪽 가게에서 들리는 흥겨운 팝송과 사람들의 흥얼거리는 콧노래. 듣기로 당시 명동거리는 이러했으리라.
시인의 말대로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모든 사람은 가고, 사랑도 가고, 그저 가슴속에, 눈동자 입술은, 이제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박인환 평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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