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의 초기 시(화사집)가 '피'로 상징되는 동물적이고 육체적인 힘과, 성적이고 관능적인 '강렬한 아름다움'의 뜨거운 원시적 부르짖음을 표현했다면, '귀촉도', '서정주 시선'을 거치는 동안 어느새 그 뜨거움은 사라지고, '신라초', '동천'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고전적인 절제의 경지'에 이르는 엄청난 변모를 한다. 이는 현세적 차원에서의 20대 발상으로부터, 내세적 차원(영원적)의 50대의 발상까지 변모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시 세계의 변화
화사집(식민지 시대. 어둡다. 땅. 동물적)ㅡ귀촉도(설화)ㅡ서정주 시선 ㅡ신라초(신라 정신)ㅡ동천(하늘. 무. 영원성)ㅡ질마재 신화(땅과 하늘의 합일)
귀촉도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감상: 귀촉도는 소쩍새(두견이)를 말한다. 화자가 사랑하는 '님'은 다시 오지 못하는 먼 길, 저승길 즉 '서역 삼만리', '파촉 삼만리'로 떠났다. 너무 슬퍼서 눈물이 '아롱아롱' 맺힌다. 살아 있을 때 '머리털'이라도 엮어서 '신이나 삼아줄걸' 못내 아쉬워 '호올로 가신 님'을 그리워하며, 여성 화자는 밤에만 운다는 '소쩍새'가 되어 운다. '님'과 사별한 한 여인의 처절한 사랑을 '귀촉도 설화'와 접목시켜 애틋한 슬픔과 그리움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시집 <서정주 시선>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운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감상: '그 원인이 있어 그 결과가 있다'는 '연기설'은 불교의 '인연'과 맞닿아 있다. '국화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소쩍새'와 '먹구름', '무서리, 불면' 등 괴로운 인고의 시간을 그렇게 '울면서' 견디고 견뎌 버틴 것이다. 젊은 시절 그립고 고생하던, 지금은 성숙되어 돌아와 환하게 웃는 누님과 닮은 사랑스러운 꽃이다. 소쩍새 우는 '봄'부터, 여름 장마 천둥,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 무서리 내리는 늦가을 날, 드디어 국화꽃이 활짝 피었다.
국화와 상관이 없는 무수한 존재들이 걱정을 하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모든 존재들은 '인연'을 맺고, 관련이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면서 살아간다는 '불교의 연기설'의 섭리를 시인은 말하고 있다. 모든 만물의 탄생의 고통과 생명의 경이로움과, 잘 참고 인내하면 성숙해진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라 하겠다.)
무등을 보며(부분)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 빛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감상: 시인이 6,25 전쟁 직후 광주에서 교수로 재직당시 쓴 시로, 어떠한 외부 환경에도 늘 변함없이 꿋꿋하게 서 있는 무등산을 보며, 우리 인간들도 힘든 시련에 의연하게 버텨 나가자는 교훈을 담은 작품이다. 이 시는 가난이 인간의 본질이 아니며 강건한 무등산처럼 살아가자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학(부분)
천년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학이 나른다
천년을 보던 눈이/천년을 파닥거리던 날개가/ 또 한 번 천애에 맞부딪누나
산덩어리 같아야 할 분노가/ 초목도 울려야 할 설움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보라, 옥빛, 꼭두서니,/ 보라, 옥빛, 꼭두서니,/ 누이의 수틀을 보듯/ 세상을 보자
(감상: 학은 고상하고 고결한 동물이다. 고운 강물이 흐르듯 고상한 학은 겸손하면서도 도도히 나른다. 천년을 살자던 남편을 사별하고 또 천년 같은 남은 인생을 '산' 같은 분노, 초목을 울릴 '설움'을 참아내며, 겉으로 표현도 못하고, 지아비를 그리며 수절하다 늙어가는 고결한(?) 청상과부의 삶이다. '학'처럼 고결한 삶을 강요하는 우리 도덕에 대한 비판으로, 도덕에 희생되어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여인의 연민을 고고한 학에 빚대어 표현한 시이다.)
마치며
서정주 시인의 문학 작품은 탁월한 언어 구사와 소재 선택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순수 문학적 색채를 지향했으며, 전통적 요소의 소재를 많이 차용한 것으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그의 시적 언어는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표현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언어'라고 어느 평론가는 말을 한다. 서정주 시인은 한국 현대시의 '거목'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는 명시의 작품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무등을 보며, 학, 국화옆에서'는, 6,25 참상을 겪은 국민의 정서를 어루만져주는 뜻으로 발표한 '서정주 시선'집에 실린 시다. (1편 '화사집'. 2편 '귀촉도, 시집 '서정주 시선'.)
(참고문헌: 미당 서정주 전집. 한국 현대문학 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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