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무질서의 이성복 시인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서울대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고통의 시적 변용'을 완성한 시인이다. 한 편 한 편의 시가 시인의 고통스러운 삶의 한 부분씩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그것들이 서로 유기적인 결합관계를 유지하며 나름의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충격은 우상 파괴와 해체 문법에 있다.(송재학). '비속어와 속어들의 대화법', '묘한 비유법', 불규칙한 배열의 시행', '역설과 반어' 등이 자유롭게 사용되고 있다.(박덕규)
<고통의 시적 변용>
그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속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날' 감상: '그날'은 평범한 일상의 한 날이다.'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는 반어적 표현인데, '고통인데 아무도 느끼지 못한다는 반어이다. '잡초 뽑는 여인들'은 차별받는 여자들을 표현했고, '집 허무는 사내들'은 가난한 사내들이 자기 집도 없으면서 남의 집을 허무는 1980년대 상황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고통 속에 있지만, 고통이 너무 많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 상황을 반어법으로 말하고 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 즉 고통의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관심과 남의 고통은 듣고 싶지 않은 시대적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 몸 어딘가가 썩어 들어가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이보다 난처한 일이 있을까? 문제는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있다. 오히려 아픔은 '살아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나 할 것이다. 그러나 아픔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 아픔을 가져오게 한 것들을 은폐하거나 신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신경은 마비되고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이다. 80년대 정치 상황은 고통이지만, 지적인 태도로 접근하며 내면적 성찰을 한다.)
어두워질 때까지
사랑하는 일도 사람의 일이라 때로는 버겁고 힘겹게 여겨질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디라도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힌다.
그 떠남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로부터가 아니라, 그것들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떠남이다. 모든 떠남은 진정한 자신으로의 돌아옴을 의미한다. 떠남은 결국 사랑으로 가는 먼 길의 돌림길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아무리 추악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랑을 감추고 있다. 삶은 사랑이다. 삶과 사랑이라는 결코 포개질 수 없는 두 개의 다른 그림 사이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산다는 것은 이 두 개의 그림이 사실은 동일한 것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무를 접 붙이는 일, 혹은 죽은 나무에서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일.
모든 것은 현실 속에 있다. 현실로부터 아무리 멀리 떠난다 해도,
우리는 엄마 등에 업힌 아이처럼 현실의 품 안에 있다. 울며 보채는 우리에게 어머니는 근심스레 타이르 신다.
아들아, 아직은 밤이 깊지 않았다. 더 어두운 밤이 올 때까지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단다.
(시인은 지금 대낮과 밤의 경계선에 서서 어두워지기 전까지 '사랑'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해가 져도 나의 사랑은 저물지 않고, 하지만 현실은 한낱 주관적 관념의 세계로서 아름다운 생명이 비치는 '슬픈 사랑의 아름다움'이 된다.)
마치며
이성복 시인의 작품은, 시란 아름다움도 아니며 세련된 리듬도 아니다. 그렇다고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시인의 시는 대상이 의식에 나타나는 바로 그 순간의 잉태이기 때문에, 그의 시는 흔히 의미의 세련성이나, 깎고 다듬어 아름답게 만드는 '조소성'을 갖고 있지 않다. 얼핏 보기에 혼란스러움은 거기에서 연유한다.
1980년대 이성복 시인은 고통의 시적 변용과 무질서 형식의 시 세계를 구축했다. 또한 삶의 불모성과 무기력, 불감증에 대한 비판으로 편안해 보이는 일상 속의 숨어있는 무서운 현실 일깨우기를 시도하였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현실 일깨우기이다. '아픔'을 온전히 '아픔'으로 존재하게 만들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시인이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는 대상 세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남호 '80년대 시의 심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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