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예.

5.18의 시 "그날", 정태춘의 노래 "5. 18"

e길 2023. 5. 18. 01:32
반응형

5.18의 시 '그날'은, 2007년 제3회 5.18 민주화운동 기념 서울 청소년 백일장에서 대상을 받았고, SNS에 '천재 고교생의 5.18시'로 화제가 되었던 시이다. 당시 '심사 위원 중 한 명인 정희성 시인은 '그날'의 현장을 몸 떨리게 재현해 놓은 놀라운 솜씨, 직접 경험한 사람도 이렇게 쓸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노래 5.18은 정태춘 가수가 1996년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열린 '안티 비엔날레'를 앞두고 만들었다. 

계엄군에게 포박, 끌려가는 시민

시 <그날> (정민경)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자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깨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 것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 데잉 발이 안 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 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더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재.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정민경시인은 '5.18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가족은 없지만, 아버지 친구분 중에 5.18 때 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등 아직도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분들이 많다'며 부모님은 평생 주변에서 5.18 피해자들을 보셨기 때문에 저 역시 자연스럽게 '오월 광주'를 많이 듣고 자랐다고 말했다. 시인은 대상을 받은 뒤 '그날'의 저작권을, 백일장을 주최했던 5.18 민주화운동 서울 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그날'을 쓴 뒤 한동안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만큼 시의 화자에게 몰입했다며, '이 시가 제 손을 떠나 5.18 희생자들을 위해 보다 많은 곳에 쓰일 수 있기를 바랐다'라고 전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19세 당시 고등학생이던 정민경시인의 삶을 뒤바꿔 놓았다. '시를 발표한 이후 정치적인 이념 때문인지 학교에서 나를 괴롭히는 교사들이 있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 시를 인쇄해 반마다 돌아다니며 '빨간 펜으로 이 시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라'라고 말하며 망신을 준 일도 있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전했다. 결국 2년 늦게 대학을 갔다. (참고문헌: 나무위키)  

노래 <5. 18> (정태춘)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거리에도, 산비탈에도 너희 집 마당가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저 꽃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그 꽃을 베어진 날에 아 빛나던 별들

송정리 기지촌 너머 스러지던 햇살에, 떠오르는 헬리콥터 날개 노을도 찢고 붉게...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소릴 들었소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의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 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누이들의 무덤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태극기 아래 시신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절규하는 통곡 소릴 들었소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피가 끓어 솟구친다. 저벅저벅 무법자의 군홧발 소리, 헬기의 굉음과 함께 시작된 노래가 끝날 때쯤이면 어느새 눈물이 말없이 흐른다. 가수 정태춘에게도 '1980년 광주'는 노래 인생을 바꾸는 대 사건이었다고 한다. 80년 5월 4일 가수 박은옥과 결혼했다.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그에게 예비군 비상 동원령이 소집되었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풍문으로 광주 이야기를 들었고, 황석영의 광주 보고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기 전까지 그는 '시인의 마을'로 신인 가수상을 받은 포크 가수였다. 뒤늦게 광주의 진실을 안 그는, 그러잖아도 정의감에 불타고 군부에 비판적이던 청년을 '투사'로 만들었다. 그는 '서정성' 대신 '리얼리즘'을 장착한 노래를 무기로 '무대' 보다는 '현장'을 누볐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5. 18'은 현대사의 비극에 침묵으로 일관해온 대중 음악계의 과오를 씻는 노래가 되었다. 그로부터 40년, '광주 5.18'은 우리에게 붉은 꽃을 심을 수 있냐고 묻는다

 

'노래, 5.18' (열린 음악회)

 

노래. '5.18'

 

 

반응형